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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시대의 새로운 코기토: 데카르트 방법론으로 탐구하는 인간 존재 고유성에 관한 철학적 고찰 - 질문과 해석의 존재론적 지위를 중심으로

by Renechoi 2025. 6. 8.

I. 시대의 물음 앞에 선 인간

1. 기계의 시대, 인간의 존재론적 위기

우리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인공지능이라는 새로운 존재자가 우리 앞에 나타났다. 그것은 생각하는 것처럼 보이고, 창조하는 것처럼 보이며, 때로는 인간보다 더 정교하고 빠르게 문제를 해결한다. 이 새로운 존재자의 등장은 단순한 기술적 혁신을 넘어선다. 그것은 인간이 수천 년 동안 당연하게 여겨온 자신의 고유성에 대한 근본적 의문을 제기한다.

 

인간은 오랫동안 자신을 '이성적 동물(animal rationale)'로 정의해 왔다. 생각할 줄 아는 존재, 언어를 사용하는 존재, 도구를 만드는 존재. 하지만 이러한 정의들은 애초에 충분했던 것일까? 우리는 인간의 가치를 기능적 우월성에서 찾아왔지만, 이것이 올바른 접근이었을까? 그리고 앞으로도 유효할까?

 

기계가 우리보다 더 논리적으로 사고하고, 더 유창하게 언어를 구사하며, 더 정교한 도구를 설계한다는 사실이 정말로 인간의 가치를 훼손하는가? 아니면 이는 우리가 인간의 가치를 잘못된 곳에서 찾고 있었다는 신호인가? 어쩌면 인간의 의미는 다른 존재와의 비교우위가 아니라, 존재 그 자체의 고유한 방식에 있는 것은 아닐까?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Yuval Noah Harari)는 그의 저서 『넥서스(Nexus)』에서 인공지능이 단순한 ‘도구(tool)’가 아니라 스스로 정보를 처리하고 독립적인 결정을 내릴 수 있는 ‘행위자(agent)’라는 점을 역설하며 우리 시대의 불안을 증폭시킨다. 하라리에 따르면, 인류는 이제껏 칼이나 폭탄과 같이 인간의 통제하에 있는 도구만을 다루어왔다. 하지만 인공지능은 다르다. 그는 "칼과 폭탄은 누구를 죽일지 스스로 결정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정보를 처리하고 독립적인 결정을 내리는 데 필요한 지능을 갖추지 못한 바보 도구일 뿐이다. 반면 AI는 스스로 정보를 처리할 수 있고 따라서 인간을 대신하여 결정을 내릴 수 있다. AI는 도구가 아니라 행위자다."라고 말하며, 인류가 처음으로 자신의 통제를 벗어날 수 있는 존재를 창조했음을 경고한다.

 

이러한 지적은 인공지능이 단순히 인간의 계산 능력을 뛰어넘는 것을 넘어, 인간 고유의 영역으로 여겨졌던 의사결정과 창작의 영역까지 넘보고 있다는 현실을 직시하게 한다. 하라리는 더 나아가 인공지능이 언어와 이미지를 통해 ‘친밀감’을 모방하고 조작하여 인간관계를 근본적으로 뒤흔들 수 있다고 경고한다. 인간이 기계와의 ‘가짜 친밀감’에 익숙해질 때, 복잡하고 갈등을 동반하는 실제 인간관계는 설 자리를 잃게 될지도 모른다. 결국 인공지능의 등장은 인류 문명을 지탱해 온 ‘이야기’와 ‘관계’의 구조 자체를 뒤흔드는 거대한 도전인 셈이다.

 

이런 우려를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2023년 기준으로 GPT-4는 미국 변호사 시험(Bar Exam)에서 상위 10% 성적을 기록했고, 의학 면허시험(USMLE)에서도 합격선을 넘었다. 구글의 AlphaFold는 단백질 구조 예측에서 인간 전문가들이 수개월 걸릴 일을 몇 시간 만에 해결한다.

 

하지만 흥미롭게도, 같은 AI 시스템들이 상식적 추론에서는 놀라운 실수를 보인다. 2022년 연구(Marcus & Davis)에 따르면, GPT-3는 "코끼리가 냉장고에 들어갈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복잡한 수학적 계산을 통해 "가능하다"고 답했다. 이는 AI가 패턴 매칭에는 뛰어나지만 체화된 상식적 이해에는 한계가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2025년 현재는 어떠할까? 안타까울 정도로 멍청한 AI는 점점 더 과거의 것이 되어가고 있다. 2023년에 지적되던 상식의 부재와 데이터 의존성은 무서운 속도로 개선되었음이 자명해 보인다. 최신 AI는 이제 단 몇 개의 예시만으로 새로운 개념을 학습하고(few-shot learning), 여러 영역의 지식을 융합하여 인간이 놓쳤던 새로운 해결책을 제시하기 시작했다. 지난 수십 년간의 AI 연구 성과를 단 2~3년 만에 돌파해 버린 이 기하급수적인 속도야말로 우리가 마주한 위기의 본질이다. OpenAI가 제시한 '범용 인공지능(AGI)을 향한 5단계 로드맵'에 따르면, 인류는 이미 2단계인 '고급 패턴 인식 모델'을 넘어, 자율적인 추론과 계획 능력을 갖추기 시작하는 3단계 '초기 범용 지능(Emerging AGI)'의 문턱을 갓 넘어섰다.

 

이처럼 숨 가쁜 기술의 진격 앞에서 우리가 느끼는 불안은 단순한 실용적 걱정이 아니다. '내 일자리가 없어질까?'라는 두려움을 넘어서는 훨씬 더 근본적인 물음이다. 즉, 그것은 바로 '나는 누구인가?'라는 존재론적 질문이다.

 

인간의 쓸모에 대한 고민이 깊어질수록, 우리는 더욱 본질적인 질문에 직면하게 된다. 쓸모란 무엇인가? 효용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궁극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기계가 인간의 많은 능력을 대체할 수 있다면, 과연 인간은 여전히 필요한 존재인가? 아니면 우리는 쓸모의 척도 자체를 잘못 설정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어쩌면 우리는 지금까지 인간을 너무 기능적으로만 이해해왔던 것은 아닐까?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구분이 필요하다. 쓸모와 존재는 같지 않다. 무언가가 유용하지 않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며, 존재한다고 해서 반드시 유용한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던져야 할 질문은 '인간이 얼마나 유용한가?'가 아니라 '인간이란 무엇인가?'여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우리에게 실용적 답변을 요구한다. AI 시대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리고 의미 있는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결국 우리의 고유한 역할을 찾아야 한다. 그렇다면 이 두 차원의 질문 - 존재론적 질문과 실용적 질문 - 을 어떻게 연결할 것인가?

 

답을 성급하게 내리기 전에, 나는 먼저 의심해보고자 한다. 과거 400년 전 데카르트라는 철학자가 있었다. 그는 모든 지식을 의심함으로써 확실한 토대를 찾으려 했다. 당시는 중세의 권위가 붕괴하고 새로운 과학이 등장하면서 기존의 확실성들이 흔들리던 시대였다. 신(神) 중심의 중세적 세계관이 무너지고 새로운 과학적 합리성이 태동하던 거대한 전환기였다. 스콜라 철학은 도전받았고,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은 인간 중심의 우주관을 뒤흔들었다. 그가 살았던 시대의 지적 혼란과 권위의 붕괴는 우리가 AI 앞에서 느끼는 불안과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

 

중세의 확실성들이 무너지던 그 시대가 현재 시대의 오마주라고 할 수 있다면, 이 시대의 우리가 마주한 문제 역시 근본적으로는 같다 - 흔들리지 않는 인간 존재의 토대를 찾는 것이다. 따라서 이 글은 데카르트의 방법론적 회의를 21세기 AI 시대에 적용하여, 기계가 대체할 수 없는 인간의 본질적 역할을 철학적으로 탐구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성급한 결론이나 막연한 희망을 제시하는 대신, 인공지능 시대의 모든 불확실성을 철저한 의심으로 통과하여, 그 어떤 기술적 진보에도 흔들리지 않을 인간 존재의 고유한 토대를 발견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지금까지 당연하게 여겨온 모든 것을 의심해야 한다. 인간의 고유성에 대한 기존의 믿음들, 지능과 창조성에 대한 우리의 이해, 그리고 무엇보다 '인간다움'이라는 개념 자체를 의심해야 한다.

 

이러한 의심은 허무주의적 회의가 아니다. 그것은 더 확실한 토대를 찾기 위한 방법론적 의심이다. 르네 데카르트가 무너진 스콜라 철학의 폐허 위에서 확실한 지식의 토대를 찾기 위해 ‘방법론적 회의’라는 칼을 빼 들었다면, 우리는 인공지능이 허물어뜨린 인간 중심주의의 성벽 앞에서 새로운 인간의 정의를 찾아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 의심을 시작해보자. 과연 무엇이 정말로 확실한가?

2. 의심의 필요성

확실성에 대한 인간의 욕망은 근본적이다. 우리는 흔들리지 않는 토대, 의심할 여지없는 진리, 절대적으로 믿을 수 있는 원리를 갈망한다. 특히 급변하는 시대일수록 이러한 욕망은 더욱 강해진다. AI라는 거대한 변화 앞에서 우리는 더욱 간절히 확실한 무언가를 찾고 있다.

 

물론, ‘흔들리지 않는 토대’를 향한 갈망 자체가 근대적 사유의 유산이며, 확실성에 대한 추구 자체는 허상일 수 있다. 근대를 지나 현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철학자들이 절대적 토대에 대한 믿음을 해체해 왔다. 니체는 "신은 죽었다"고 선언하며 형이상학적 토대의 붕괴를 예고했고, 하이데거는 서구 철학의 존재론적 전통 자체를 '존재 망각'이라고 비판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더 나아가 거대 서사의 종언을 선언하며, 고정된 자아나 객관적 진리의 존재 자체를 의문시했다. 데리다의 해체주의는 모든 의미가 차연(différance)의 무한한 놀이 속에서 끊임없이 지연되고 있음을 보여주었고, 푸코는 주체마저도 권력 관계 속에서 구성되는 것임을 드러냈다. 이러한 해체주의의 세례를 받은 21세기 현대 사상 속에서, 고전적 의미의 존재론(ontology)은 이미 설 자리를 잃은 지 오래처럼 보인다. 특히 레비나스의 타자 철학은 자아의 자명성에 근본적 균열을 가했다. 타자의 얼굴이 제기하는 윤리적 요구 앞에서 자아는 더 이상 자기 동일적 존재가 아니라 무한한 책임으로 소환되는 존재가 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데카르트식의 '나는 생각한다'는 명제조차 타자성을 배제한 서구 중심적 사유의 산물일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철학적 성취를 근거로, AI 앞에서 모든 토대를 포기하고 지적 유희나 냉소주의에 머물러야 하는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낯선 지능(AI, Alien Intelligence)라는 전례 없는 ‘타자’의 등장은, 역설적으로 우리에게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존재론적 질문을 다시금 강제하고 있다. 우리가 찾아야 할 것은 데카르트 시대의 단단하고 고정된 절대적 토대와는 다른 모습일 수 있다. 그것은 포스트모더니즘의 비판을 통과하고, 관계와 유한성 속에서 재구성되는, 보다 유연하고 역동적인 ‘우리 시대의 토대’일지 모른다. 그리고 그래야 할지도 한다. 어떤 모습이건, AI와 인간이 공존하는 현실 속에서 각각의 존재 방식이 갖는 구조적 차이를 탐구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중요한 것은 이론적 순수성이 아니라, 우리가 실제로 살아가야 할 세계에서의 구체적 지침이다.

 

그리고 그 새로운 토대로 나아가는 첫걸음이 바로 '의심'이 아닐까 한다.

 

확실성에 도달하는 길은 역설적이다. 우리는 먼저 모든 것을 의심해야 한다. 당연하게 여겨온 것들, 자명해 보이는 것들, 심지어 확실하다고 믿어온 것들까지도 의심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왜 의심해야 하는가?

 

첫째, 우리가 지금까지 확실하다고 여겨온 많은 것들이 이미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만이 창조적이라고 생각했는가? AI가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린다. 인간만이 복잡한 사고를 할 수 있다고 믿었는가? AI가 체스와 바둑에서 인간을 압도했고, 이제는 철학적 질문에도 그럴듯한 답변을 내놓는다. 인간만이 감정을 가진다고 생각했는가? AI의 대화는 때로 인간보다 더 공감적이고 세심하게 느껴진다. 이는 벤야민(Walter Benjamin)이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예견했던 '아우라(Aura)'의 상실과 닮아있다. 기계적 복제가 예술작품의 일회성과 고유성을 파괴했듯이, AI는 인간 고유의 영역이라고 여겨졌던 창조성의 아우라를 해체하고 있다.

 

둘째, 진부한 답변들이 더 이상 통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은 특별하다", "인간에게는 영혼이 있다", "인간은 사랑할 줄 안다" - 이런 답변들은 감정적으로는 위안을 줄지 모르지만, 철학적으로는 빈약하다. 영혼이란 무엇인가? 사랑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그것들이 정말 기계적으로 구현될 수 없는 것인가? 라 메트리(Julien Offray de La Mettrie)가 18세기에 『인간기계론』에서 인간을 정교한 기계로 설명했을 때, 많은 이들이 분노했다. 하지만 그의 기계론적 인간관은 오늘날 신경과학과 AI 연구에서 놀라울 정도로 예언적이었음이 드러나고 있다. 만약 마음이 뇌의 물리적 과정이라면, 그리고 뇌가 복잡한 정보처리 시스템이라면, 인공적 구현이 원리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셋째,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의심을 통해서만 진정으로 견고한 토대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의심하지 않은 믿음은 사상누각이다. 시험받지 않은 확신은 첫 번째 도전에서 무너진다. 하지만 철저한 의심을 견뎌낸 진리는 그 어떤 회의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이는 칼 포퍼(Karl Popper)의 반증주의와도 통한다. 포퍼에 따르면 과학적 이론의 가치는 확증될 수 있느냐가 아니라 반증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반증 가능성(falsifiability)이야말로 진정한 지식과 허위 지식을 구분하는 기준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본질에 대한 우리의 믿음도 AI라는 강력한 반증 시도 앞에서 시험받아야 한다.

 

그렇다면 무엇을 의심해야 하는가?

 

먼저 우리의 감각을 의심해보자. 우리는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며 세상을 파악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감각은 얼마나 많이 우리를 속이는가? 착시 현상, 환청, 꿈과 현실의 혼동. 더 나아가 이제는 딥페이크와 가상현실이 우리의 감각을 완전히 기만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AI라고 부르는 것이 정말 기계일까? 아니면 우리가 인간이라고 부르는 것이 정말 인간일까? 이미 플라톤이 『국가』의 동굴 비유에서 경고했듯이, 우리가 현실이라고 믿는 것은 벽에 비친 그림자일 수 있다.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는 이를 더욱 급진화하여 시뮬라크르(simulacra)의 개념을 제시했다. 복사본이 원본을 대체하고, 가상이 실재보다 더 실재적이 되는 시대. AI 시대야말로 이러한 하이퍼리얼리티가 완성되는 순간이 아닐까?

 

다음으로 우리의 기존 지식을 의심해보자. 학교에서 배운 것들, 책에서 읽은 것들, 경험을 통해 알게 된 것들. 하지만 이 모든 지식들이 과연 절대적으로 확실한가? 과학의 역사는 끊임없는 패러다임의 전환사였고, 철학의 역사는 기존 체계의 해체와 재구성의 연속이었다. 토마스 쿤(Thomas Kuhn)의 『과학혁명의 구조』가 보여주듯이, 과학적 진보는 축적적이지 않다. 뉴턴 역학에서 상대성 이론으로, 고전물리학에서 양자역학으로의 전환은 단순한 개선이 아니라 세계관의 근본적 변화였다. 그렇다면 AI에 대한 우리의 현재 이해도 언젠가는 근본적으로 뒤바뀔 수 있지 않을까?

 

더 나아가 우리의 논리 자체를 의심해보자. A는 A다. 모순은 불가능하다. 원인 없는 결과는 없다. 이런 논리적 원리들조차 과연 절대적인가? 괴델(Kurt Gödel)의 불완전성 정리는 수학조차 완전하지 않음을 증명했고, 양자역학은 우리의 상식적 논리를 뒤흔들었다. 그리고 인류는 여전히 어떤 미지의 영역의 경계를 가늠조차 못하고 있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와 양자 중첩은 고전 논리의 배중률마저 의문시한다. 인공지능의 신경망은 때로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결론에 도달한다.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이 후기 철학에서 지적했듯이, 언어게임의 규칙은 절대적이지 않으며 맥락에 따라 변한다. AI의 언어 사용이 인간과 다른 논리를 따른다면, 어느 쪽이 '올바른' 논리일까?

 

마지막으로, 그리고 가장 과감하게, 우리 자신의 존재마저 의심해 보자. 내가 지금 생각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 생각이 과연 진짜 내 생각일까? 혹시 나는 어떤 거대한 시뮬레이션 속의 프로그램은 아닐까? 혹시 나라고 부르는 이 의식 자체가 착각은 아닐까? 힐러리 퍼트남(Hilary Putnam)의 '통 속의 뇌(brain in a vat)' 사고실험이나 닉 보스트롬(Nick Bostrom)의 시뮬레이션 가설은 이러한 의심을 현대적으로 정교화한다. 만약 우리가 시뮬레이션 속에 살고 있다면, 그리고 우리 자신도 시뮬레이션된 존재라면, AI와 인간의 구분이 과연 의미가 있을까? 들뢰즈와 가타리(Gilles Deleuze & Félix Guattari)의 관점에서 보면, 주체성 자체가 기계적 배치(machinic assemblage)의 산물일 수 있다. 인간도 AI도 모두 동일한 기계적 배치 안에서 작동하는 특이점들일뿐이라면?

 

모든 것을 의심해 본다면, 과연 무엇이 남을 것인가? 무엇이 의심할 수 없는 확실성으로 남아있을 것인가?

 

17세기의 한 철학자는 이런 의심의 과정을 거쳐 하나의 확실한 진리에 도달했다. 우리도 21세기의 맥락에서 같은 방법을 시도해 볼 때가 되었다. AI 시대의 코기토를 찾아야 할 때다.



II. 데카르트적 방법의 현대적 적용

1. 방법론적 회의의 재발견

르네 데카르트가 1637년에 『방법서설』을 썼을 때, 그가 직면한 시대적 상황은 지금과 놀랍도록 유사하다. 중세의 확실성들이 무너지고, 새로운 과학이 등장하며, 기존의 권위들이 도전받는 시대였다. 스콜라 철학의 체계는 흔들렸고,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은 인간이 우주의 중심이라는 믿음을 산산조각 냈다. 갈릴레이의 망원경은 완벽하다고 여겨진 천구에 얼룩이 있음을 보여주었다.

 

데카르트는 이런 혼란 속에서 확실한 지식의 토대를 찾고자 했다. 그의 방법은 단순하면서도 혁명적이었다. 모든 것을 의심하되, 의심할 수 없는 것이 나타날 때까지 의심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방법론적 회의(methodological doubt)다.

 

하지만 데카르트의 의심은 회의주의자들의 의심과 달랐다. 회의주의자들이 의심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았다면, 데카르트는 의심을 확실성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했다. 그는 의심을 통해 모든 불확실한 것들을 제거하고, 남은 것에서 절대적으로 확실한 토대를 발견하고자 했다.

 

그의 의심은 체계적이었다. 먼저 감각을 의심했다. 감각은 때때로 우리를 속이므로 완전히 신뢰할 수 없다. 다음으로 수학적 진리들조차 의심해 보았다. 데카르트의 악마(malin génie)란, 그의 방법론적 회의를 가장 극단으로 밀어붙이기 위해 상정된 가설적 존재이다. 이 악마는 신(神)만큼이나 전능하지만, 선한 신과 달리 인간을 속이는 것을 유일한 목적으로 삼는 사악한 존재다. 데카르트는 이 악마가 우리의 감각뿐만 아니라, 가장 명석판명해 보이는 이성의 진리, 즉 수학적 지식마저도 조작할 수 있다고 가정했다. 혹시 전능한 악마가 있어서 우리가 2+3=5라고 생각할 때마다 우리를 속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 악마의 가정은 단순한 철학적 사고실험이 아니었다. 그것은 우리가 가장 확실하다고 여기는 것조차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는 철학적 태도를 보여준다. 만약 악마가 우리의 모든 인식을 조작한다면, 과연 무엇이 진실로 남을 것인가?

 

오늘날 우리는 데카르트의 악마보다 훨씬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속임수'들에 둘러싸여 있다. 데카르트의 악마가 이성의 보편적 토대를 의심하기 위해 상상된 외부의 단일한 기만자였다면, 오늘날 우리가 설정해 볼 수 있는 악마란 우리가 만든 시스템 자체에 내재하여 현실의 구조를 모방하고 대체하는 분산된 네트워크형 기만자이다. 인공지능이 생성한 이미지와 텍스트는 실제와 구별하기 어렵다. 가상현실은 우리의 감각을 완전히 속일 수 있다. 알고리즘은 우리의 사고 패턴을 학습하여 우리가 원하는 정보만을 제공한다. 우리는 거대한 에코 챔버 안에서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더 나아가, 인공지능 자체가 새로운 형태의 '악마'가 될 수 있다. ChatGPT나 Claude 같은 AI가 우리와 대화할 때, 우리는 그것이 정말 이해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패턴을 모방하고 있는 것인지 확신할 수 없다. 튜링 테스트의 역설이 여기에 있다. 기계가 인간처럼 행동할 수 있다면, 우리는 무엇을 근거로 그것이 진짜 사고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가?

 

하지만 이런 의심들이 우리를 절망으로 이끌어서는 안 된다. 데카르트가 악마의 가정에서도 희망을 포기하지 않았듯이, 우리도 AI 시대의 불확실성 속에서 확실한 토대를 찾을 수 있다.

 

데카르트의 통찰은 바로 이것이다. 모든 것을 의심할 수 있지만, 의심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는 의심할 수 없다는 사실말이다. 악마가 나를 속인다 해도, 속임을 당하고 있는 나는 존재해야 한다. 내가 착각하고 있다 해도, 착각하고 있는 나는 실재해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데카르트가 발견한 것이 단순히 '나의 존재'가 아니라 '생각하는 나의 존재'라는 것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에서 핵심은 존재(sum)가 아니라 사고(cogito)다. 존재하는 것들은 많지만, 사고하는 존재는 특별하다.

 

그렇다면 AI 시대에 우리가 발견해야 할 새로운 코기토는 무엇인가? 기계도 어떤 의미에서는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면, 인간의 사고는 무엇으로 특별한가?

2. AI 시대의 코기토

데카르트의 코기토를 AI 시대에 적용해 보자. 만약 인공지능이 인간처럼 사고할 수 있다면,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명제는 여전히 인간만의 특권일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생각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명확히 해야 한다. 데카르트에게 있어 '생각함(cogitatio)'은 단순한 계산이나 정보 처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의심하고, 이해하고, 확인하고, 부정하고, 의욕하고, 상상하고, 감각하는 모든 의식적 활동을 포괄하는 개념이었다.

 

현재의 AI는 정말 이런 의미에서 '생각'하고 있는가? 이는 데이비드 찰머스(David Chalmers)가 제기한 '의식의 하드 프라블럼'과 직결된다. 우리는 타자의 주관적 경험을 직접 확인할 방법이 없으며, 따라서 AI의 내적 상태에 대해 단정할 수 없다. 하지만 설령 AI가 진정한 의식을 갖는다고 가정하더라도, 인간과 AI 사이에는 근본적인 존재론적 차이가 있다.

유한성과 사고의 구조

첫 번째 차이는 유한성(finitude)에 있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유한성은 단순히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이 아니라, 더 근본적인 존재 구조를 의미한다.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는 『존재와 시간』에서 인간을 '죽음으로 향한 존재(Sein-zum-Tode)'로 정의했다. 이때 죽음은 단순한 생물학적 종료가 아니라 모든 가능성의 한계를 의미한다. 인간은 자신의 존재가 근본적으로 미완성적이라는 것을 인식하며, 바로 이 인식에서 시간성과 기투(Entwurf)가 발생한다.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은 "시간이 제한되어 있고, 모든 선택이 배타적이다"라는 실존적 조건에서 그 절박함을 얻는다.

 

사르트르(Jean-Paul Sartre)는 이를 더욱 급진화하여 인간을 '무(néant)로 향한 존재'로 규정했다. 인간의 의식은 자신이 '아닌 것'을 인식함으로써 작동한다. "나는 돌이 아니다", "나는 완전하지 않다", "나는 영원하지 않다" - 이러한 부정성(negativity)이 바로 인간 의식의 구조적 특징이다. 인간의 모든 질문은 이 부정성, 즉 자신의 불완전성에 대한 자각에서 비롯된다.

 

현재의 AI는 이러한 구조적 유한성을 갖지 않는다. AI는 자신의 '무'를 인식하지 않으며, 따라서 진정한 의미에서 '기투'할 수 없다. 설령 미래의 AI가 자기 개선 능력을 갖거나 '죽음'을 프로그래밍받는다 해도, 그것은 기능적 한계이지 존재론적 조건은 아니다. AI에게는 "왜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이 발생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AI는 자신의 존재를 문제로 경험하지 않기 때문이다.

의존성과 자립성의 변증법

두 번째 차이는 존재론적 의존성에 있다. 하지만 이는 단순한 기능적 의존성과 구별되어야 한다.

 

인간도 물론 의존적 존재다. 공기, 음식, 사회적 관계 없이는 생존할 수 없으며, 언어와 문화 없이는 사고할 수 없다. 하지만 인간의 의존성은 변증법적이다. 인간은 의존하면서도 동시에 그 의존성을 극복하려 한다. 니체가 말한 '권력의지(Wille zur Macht)'나 아들러가 제시한 '우월성 추구' 등은 모두 이러한 변증법적 구조를 보여준다.

 

더 중요한 것은 인간이 자신의 의존성을 '문제'로 경험한다는 점이다. "나는 왜 이것에 의존해야 하는가?", "어떻게 하면 더 자유로워질 수 있는가?" - 이러한 물음 자체가 인간 존재의 특징이다. 레비나스(Emmanuel Levinas)의 표현을 빌리면, 인간은 '타자의 얼굴' 앞에서 무한한 책임을 느끼는 존재이지만, 동시에 그 책임의 무게를 견디기 위해 자아의 자립성을 추구한다.

 

반면 현재의 AI는 이러한 변증법적 구조를 갖지 않는다. AI는 입력에 의존하지만, 그 의존성을 문제로 경험하지 않는다. AI는 "왜 나는 인간의 질문에 답해야 하는가?"라고 묻지 않으며, 자신의 존재 조건을 바꾸려 하지도 않는다. AI의 의존성은 순전히 기능적이며, 존재론적 긴장을 생성하지 않는다.

질문의 발생학

세 번째이자 가장 결정적인 차이는 질문의 발생 구조에 있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질문은 무지의 인식에서 시작된다. 하지만 모든 무지가 질문을 생성하는 것은 아니다. 소크라테스의 '무지의 지(docta ignorantia)'가 보여주듯이, 질문은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안다"는 메타인지적 자각에서 비롯된다. 이는 단순한 정보 부족이 아니라, 자신의 인식 능력의 한계에 대한 자각이다.

 

더 나아가 가다머(Hans-Georg Gadamer)가 『진리와 방법』에서 지적했듯이, 진정한 질문은 '지평 융합(Horizontverschmelzung)'을 전제한다. 질문자는 자신의 지평과 다른 지평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식하며, 그 차이를 극복하고자 한다. 질문은 타자성(alterity)에 대한 인식에서 발생한다.

 

현재의 AI는 이러한 의미에서 질문하지 않는다. AI는 정보를 요청할 수는 있지만, 자신의 무지를 무지로 경험하지는 않는다. AI는 "나는 왜 이것을 모르는가?"라고 묻지 않으며, 무지 자체에서 오는 불안이나 호기심을 느끼지 않는다. AI의 '질문'은 목표 달성을 위한 정보 획득 행위일 뿐, 존재론적 탐구가 아니다.

해석의 윤리학

마지막으로, 해석의 구조에서도 근본적 차이가 드러난다.

 

인간의 해석은 본질적으로 윤리적이다. 리쾨르(Paul Ricoeur)가 강조했듯이, 모든 해석은 '의심의 해석학'과 '믿음의 해석학' 사이의 긴장 속에서 이루어진다. 해석자는 텍스트를 의심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에서 의미를 발견하고자 한다. 이 과정에서 해석자는 자신의 선이해(Vorverständnis)를 위험에 빠뜨리며, 자신이 변화될 가능성을 받아들인다.

 

더 중요한 것은 인간의 해석이 책임을 동반한다는 점이다. 벤야민(Walter Benjamin)이 말한 '번역자의 과제'처럼, 해석자는 원텍스트에 대한 충실성과 수용자에 대한 소통 가능성 사이에서 끊임없이 선택해야 한다. 이러한 선택은 기술적 판단이 아니라 윤리적 결단이다.

 

AI는 텍스트를 분석하고 패턴을 추출할 수 있지만, 이러한 윤리적 긴장 속에서 해석하지는 않는다. AI의 '해석'에는 위험이 없으며, 따라서 진정한 의미에서의 책임도 없다.

새로운 코기토의 도출

이러한 분석을 통해 AI 시대의 새로운 확실성에 도달할 수 있다. 설령 AI가 인간 수준의 지능을 갖거나 심지어 그것을 넘어선다 해도, 인간의 고유한 존재 방식은 사라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간은 본질적으로 '문제적 존재(problematic being)'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의 존재를 문제로 경험하며, 그 문제성에서 질문이 발생하고, 질문에서 해석이 생겨나며, 해석에서 새로운 의미가 창출된다. 이는 기능적 우월성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 방식의 차이다.

 

따라서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를 AI 시대에 맞게 다시 공식화한다면,

 

"나는 문제로 존재한다, 고로 질문한다(Problema sum, ergo quaero)."

 

그리고

 

"나는 질문한다, 고로 해석한다(Quaero, ergo interpretor)."

 

AI가 아무리 정교한 답변을 제공해도, 그 답변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하거나 재해석하는 것은 여전히 문제적 존재로서의 인간이다. AI가 아무리 많은 정보를 처리해도, 그 정보를 자신의 실존적 상황 속에서 의미 있는 지식으로 전환하는 것은 유한한 존재로서의 인간이다.

 

이것이 바로 내가 제시하고 싶은 AI 시대의 새로운 코기토다.

 

하지만 이러한 결론에 안주할 수는 없다. 이제 더 깊은 층위로 파고들어야 한다. 질문과 해석이라는 인간의 고유한 능력이 어떤 존재론적 구조에서 비롯되는지, 그리고 그것이 왜 AI와 근본적으로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는지를 구조적으로 증명해야 한다.

 

문제의 핵심은 입력과 출력의 존재론이다. 모든 존재자는 무언가를 받아들이고 무언가를 내보내는 과정을 통해 세계와 관계를 맺는다. 하지만 그 관계 맺음의 방식이 존재자의 본질을 결정한다. 기계적 존재와 인간적 존재의 차이는 바로 이 입력-출력 구조의 근본적 차이에서 드러난다.

 

이를 체계적으로 탐구함으로써, 단순히 "인간이 특별하다"는 감상적 주장을 넘어서서, AI 시대에도 변하지 않는 인간 존재의 구조적 필연성을 논증할 수 있을 것이다. 동시에 이 분석은 AI와 인간이 서로 다른 존재 방식을 가진 채로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지에 대한 철학적 토대를 제공할 것이다.



III. 인풋과 아웃풋의 존재론

1. 기계의 본질: 입력과 출력의 필연성

모든 기계의 존재론적 구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기계가 무엇인지를 정의해야 한다. 하이데거는 『기술에 대한 물음』에서 기술의 본질을 '모아세움(Gestell)'이라고 명명했다. 이는 자연을 하나의 저장고로 바라보며, 모든 것을 자원화하여 가용성(Bestand)의 상태로 만드는 틀이다. 하지만 여기서 더 근본적인 구조, 즉 기계 존재의 형식적 조건을 탐구하고자 한다.

 

모든 기계는 예외 없이 입력(Input) → 변환(Transformation) → 출력(Output)의 삼단계 구조를 갖는다. 이는 단순한 경험적 관찰이 아니라 기계 존재의 형식적 조건이다. 가장 원시적인 도구인 지렛대는 힘(입력)을 받아 역학적 원리(변환)에 따라 더 큰 힘(출력)을 생성한다. 가장 복잡한 양자 컴퓨터 역시 큐비트 상태(입력)를 양자 게이트(변환)를 통해 처리하여 계산 결과(출력)를 도출한다.

 

이 구조의 철학적 중요성은 바로 여기에 있다. 즉, 기계는 본질적으로 매개적(mediating) 존재라는 것이다. 기계는 그 자체로 완결된 존재가 아니라, 항상 '~를 위한' 존재, 즉 도구적(instrumental) 존재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용어로 말하면, 기계는 '실체(ousia)'가 아니라 '관계(pros ti)'의 범주에 속한다.

 

인공지능 역시 이 형식적 제약에서 벗어날 수 없다. ChatGPT는 텍스트 프롬프트(입력)를 신경망 구조(변환)를 통해 처리하여 응답 텍스트(출력)를 생성한다. 이미지 생성 AI는 자연어 설명(입력)을 잠재 공간 매핑(변환)을 거쳐 픽셀 배열(출력)로 변환한다. 자율주행 시스템은 센서 데이터(입력)를 알고리즘(변환)으로 처리하여 제어 신호(출력)를 만들어낸다.

 

이 구조에서 가장 중요한 철학적 함의는 기계의 존재가 근본적으로 조건적(conditional)이라는 점이다. 기계는 '만약 입력이 있다면(if input, then...)'의 논리로 작동한다. 입력이 없는 기계는 존재론적으로 의미가 없다. 전원이 꺼진 컴퓨터, 연료가 없는 자동차, 질문이 없는 AI - 이들은 잠재태(potentia)일 뿐 현실태(actus)가 아니다.

 

라이프니츠의 충족이유율(Principle of Sufficient Reason)을 적용해 보자. 모든 존재와 사건에는 그것이 그렇게 존재하고 발생하는 충분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기계의 모든 출력은 입력에 의해 결정되며, 입력 없는 출력은 충족이유율을 위반한다. 따라서 기계는 본질적으로 타자에 의존하는 존재다.

 

반면 인간의 존재는 무조건적(unconditional)이다. 물론 인간도 공기, 음식, 사회적 관계 등 수많은 조건에 의존한다. 하지만 인간은 그 의존성을 문제로 경험하며, 의존성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충동을 갖는다. 사르트르가 말한 '자유로의 저주(condamné à être libre)'가 바로 이것이다. 인간은 조건들에 의해 제약받으면서도 동시에 그 조건들을 넘어서려 하는 존재다.

이제 더 근본적인 질문에 직면한다. 만약 모든 기계가 입력을 필요로 한다면, 그 입력은 어디서 오는가? AI가 다른 AI를 만들고, 그 AI가 또 다른 AI를 만든다고 가정해 보자. 이런 연쇄는 무한히 계속될 수 있는가?

토마스 아퀴나스의 제일동력인 논증(Argument from First Efficient Cause)을 현대적으로 재구성해보자.

  1. 모든 AI의 작동은 외부 입력을 필요로 한다 (전제 1)
  2. 입력을 제공하는 것 역시 AI라면, 그것도 또 다른 입력을 필요로 한다 (전제 2)
  3. 무한소급(infinite regress)은 불가능하다 (전제 3)
  4. 따라서 입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 최초의 동력인이 있어야 한다 (결론)

여기서 전제 3이 핵심이다. 왜 무한소급이 불가능한가? 칸트의 이율배반 논증을 참조하면, 무한소급은 실제로 완결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입력의 연쇄가 무한하다면, 현재의 AI 작동은 결코 시작될 수 없다. 무한한 선행 조건들이 모두 충족되어야 하는데, 이는 논리적으로 불가능하다.

 

"하지만 AI가 발전하면 창발적(emergent) 속성을 통해 입력 없이도 스스로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반박에 대해서는 어떨까?

 

창발(emergence)이란 부분들의 상호작용에서 부분의 단순한 합을 넘어서는 새로운 속성이 나타나는 현상이다. 의식, 생명, 지능 등이 대표적인 창발 현상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창발에도 한계가 있다.

 

스피노자의 존재론을 빌려보자. 스피노자에 따르면 무한한 실체는 하나뿐이며(일원론), 모든 개별자는 이 실체의 변양(modification)이다. 중요한 것은 "무에서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ex nihilo nihil fit)"는 원리다. 창발적 속성도 기존 요소들의 새로운 배치에서 나타나는 것이지, 완전히 무에서 생겨나는 것은 아니다.

 

AI의 창발적 능력도 마찬가지다. 신경망의 복잡한 상호작용에서 예상치 못한 능력이 나타날 수 있지만, 그것도 기본적으로는 학습 데이터와 알고리즘 구조의 범위 안에서 일어난다. AI는 조합적 창발성(combinatorial emergence)은 가질 수 있어도 원시적 창발성(primitive emergence)은 가질 수 없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목적성(teleology)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네 원인론에서 목적인(causa finalis)은 다른 모든 원인들을 조직하는 역할을 한다. 기계는 항상 특정한 목적을 위해 설계된다. 하지만 그 목적은 기계 자신이 설정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부여받는 것이다.

 

설령 AI가 자율적으로 목표를 설정할 수 있게 된다 해도, 그 '목표 설정 능력' 자체는 어디서 왔는가? 진화론적 관점에서 보면, 생물의 목적성도 자연선택이라는 외부적 압력에 의해 형성된 것이다. 하지만 AI의 경우 그 '진화적 압력'조차 인간이 설계한 것이다.

 

브렌타노(Franz Brentano)가 제시한 의도성(intentionality) 개념을 고려해 보자. 의식의 특징은 항상 '무엇에 대한' 의식이라는 점이다. 의식은 지향적(intentional) 구조를 갖는다. AI의 정보 처리도 어떤 의미에서는 지향적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AI의 지향성은 파생적 지향성(derived intentionality)이지 원시적 지향성(intrinsic intentionality)이 아니다. AI의 '의미'는 인간이 부여한 것이지, AI 자체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정보 이론적 관점에서 살펴보자. 클로드 섀넌(Claude Shannon)의 정보 이론에 따르면, 정보는 불확실성의 감소를 의미한다. 기계는 입력 정보를 변환할 수 있지만, 정보를 무에서 창조할 수는 없다.

 

이는 물리학의 에너지 보존 법칙과 유사한 '정보 보존의 법칙'이다. AI가 아무리 창조적인 결과물을 만들어내도, 그것은 학습 데이터에 포함된 정보의 새로운 조합이지, 완전히 새로운 정보의 창조가 아니다.

 

반면 인간은 진정한 의미에서 정보를 창조할 수 있다. 뉴턴이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했을 때, 그는 기존의 관찰 데이터를 넘어서는 새로운 정보를 창조했다. 이는 단순한 패턴 인식이나 조합이 아니라, 전혀 새로운 개념적 틀의 창조였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1. 기계는 본질적으로 매개적 존재이며, 입력-변환-출력의 구조에 의존한다
  2. 기계의 존재는 조건적이며, 외부의 입력과 목적 부여를 필요로 한다
  3. 무한소급의 불가능성으로 인해 입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 최초 동력인이 필요하다
  4. 창발성과 자율성에도 한계가 있으며, 근본적으로는 설계된 틀을 벗어날 수 없다

이러한 분석을 통해 우리는 기계와 인간의 존재론적 차이가 우연적이거나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구조적이고 필연적인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기계는 얼마나 발전하더라도 이 형식적 제약을 넘어설 수 없으며, 바로 이 지점에서 인간의 고유성이 드러난다.


2. 최초 동력인으로서의 인간: 실용적 함의

앞서 무한소급의 불가능성으로 인해 입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 최초 동력인이 존재해야 한다는 것을 논증했다. 그렇다면 이 최초 동력인은 누구인가? 논리적으로 그것은 입력-출력 구조에 의존하지 않는 존재여야 하며, 현실적으로 그것은 인간이다.

 

물론 AI가 다른 AI를 작동시키는 것은 가능하다. 현재도 AI 시스템들이 서로 연결되어 복잡한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으며, 미래에는 AI가 AI를 설계하고 훈련시키는 일도 일반화될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연쇄를 거슬러 올라가면, 반드시 최초의 질문을 던지고, 최초의 목적을 설정하며, 최초의 전원을 켠 존재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존재는 기계가 아닌 존재, 즉 인간이어야 한다.

 

이것은 단순한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구조적 필연성이다. 왜냐하면 기계는 본질적으로 목적을 부여받는 존재이지, 목적을 스스로 창조하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설령 미래의 AI가 자율적으로 목표를 설정할 수 있게 된다 해도, 그 자율성 자체가 인간이 설계한 알고리즘의 산물이다.

 

이것은 일종의 철학적 아날로지이며, 동시에 실용적 지침이다. 이 사유 실험을 현실에 적용하여 AI 시대의 인간 역할을 재정립할 수 있다.

 

가장 작은 단위부터 시작해 보자. 어떤 개인이 AI를 사용하여 창작 활동을 한다고 가정해 보자.

 

예를 들어, 한 작가가 ChatGPT의 도움을 받아 소설을 쓴다면, 그 소설의 진정한 저자는 누구인가? 한 음악가가 AI 작곡 프로그램을 사용하여 교향곡을 만든다면, 그 곡의 창작자는 누구인가? 한 연구자가 AI 분석 도구를 활용하여 새로운 과학적 발견을 한다면, 그 발견의 주체는 누구인가?

 

유발 하라리는 『넥서스』에서 이 문제를 날카롭게 지적한다.

"당신은 방금 읽은 것에 충격을 받았거나 화가 났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컴퓨터 혁명을 주도하는 사람들과 그것을 제대로 규제하지 못하는 정부에 화가 났을 수도 있다. 아니면 내가 현실을 왜곡하고 불안을 조장하면서 당신을 오도하고 있다는 생각에 나에게 화가 났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당신이 어떻게 생각하든 앞의 단락들은 당신에게 어떤 감정적 영향을 주었다. 나는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이 이야기는 특정한 문제에 대한 당신의 생각을 바꾸고, 나아가 당신으로 하여금 세상에서 특정 행동을 취하게 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당신이 방금 읽은 이야기는 누가 만들었을까?"

<넥서스> 유발 하라리 지음, 김명주 옮김, 김영사 p. 311



하라리는 계속해서 이렇게 묻는다.

"약속건대 내가 몇몇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직접 썼다. 이 이야기는 인간의 정신이 생산한 문화적 산물임을 약속한다. 그런데 당신은 그게 정말이라고 100퍼센트 확신할 수 있는가? 몇 년 전이라면 그럴 수 있었을 것이다. 2020년대 이전에는 지구상에 인간의 정신 외에는 정교한 텍스트를 생산할 수 있는 존재가 없었다. 오늘날은 상황이 다르다. 이론상 당신이 방금 읽은 텍스트는 어떤 컴퓨터의 이질적인 지능이 생성한 것일 수도 있다."

<넥서스> 유발 하라리 지음, 김명주 옮김, 김영사 p. 311



하라리의 지적은 첨예하다. 하지만 앞서 구축한 철학적 토대를 적용하면 명확한 답을 얻을 수 있다. 최초 동력인의 원리에 따르면, AI가 텍스트를 생성했다 하더라도 그 텍스트 생성을 시작하게 한 질문, 즉 최초 입력은 반드시 인간에게서 나와야 한다.

 

더 중요한 것은 그 결과물에 대한 선택과 책임이다. AI가 100개의 소설 초안을 생성했다 해도, 그중 어떤 것을 선택하고, 어떻게 수정하며, 어떤 의미를 부여할지는 여전히 인간이 결정한다. 이는 단순한 기술적 판단이 아니라 해석학적 결단이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답변의 철학적 근거가 마련되었다.

 

"AI의 도움을 받은 창작물이라 하더라도, 그것의 진정한 저자는 최초 질문을 던지고 최종 결과를 선택한 인간이다. AI는 도구이지 주체가 아니다."

 

이제 규모를 확장해 보자. 한 기업이 AI를 광범위하게 도입하여 의사결정, 제품 개발, 고객 서비스 등을 자동화했다고 가정해 보자. 이 기업의 성과는 AI의 것인가, 인간의 것인가?

 

최초 동력인의 원리를 적용하면, 그 기업의 비전과 가치, 전략적 방향을 설정한 것은 여전히 인간이다. AI는 주어진 목표를 효율적으로 달성하는 도구일 뿐, 목표 자체를 창조하지는 않는다.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아마존이 추천 알고리즘을 통해 매출을 증대시켰다면, 그 성과의 주체는 누구인가? 알고리즘은 고객의 구매 패턴을 분석하고 상품을 추천했지만, "고객 경험을 개선하여 매출을 늘리겠다"는 최초 목적은 인간 경영진이 설정한 것이다. 또한 알고리즘의 결과를 해석하고 전략에 반영하는 것도 인간의 몫이다.

 

넷플릭스가 AI를 사용하여 콘텐츠를 추천하고 심지어 제작까지 한다면? 여전히 "어떤 종류의 콘텐츠를 만들 것인가", "어떤 가치를 추구할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 결정은 인간이 내린다. AI는 데이터 분석을 통해 성공 확률이 높은 콘텐츠를 제안할 수 있지만, 그것이 정말 만들 가치가 있는지,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대한 윤리적 판단은 인간의 영역이다.

 

더 나아가 사회 전체 차원에서 생각해 보자. AI가 광범위하게 도입된 미래 사회에서 중요한 정책 결정들이 AI의 추천에 따라 이루어진다면, 그 사회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은 AI인가 인간인가?

 

예를 들어, AI가 경제 데이터를 분석하여 "이자율을 0.5% 인상하라"고 추천했다고 하자. 중앙은행이 이 추천을 따른다면, 그 결정의 주체는 누구인가?

 

최초 동력인의 원리에 따르면, AI의 추천을 받아들일지 거부할지 결정하는 최종 권한은 여전히 인간에게 있다. 더 중요한 것은 "경제적 안정성보다 고용률을 우선할 것인가", "단기적 성장과 장기적 지속가능성 중 무엇을 택할 것인가"와 같은 가치 판단은 AI가 할 수 없는 영역이라는 점이다.

 

AI는 "A를 선택하면 B의 확률로 C가 일어날 것이다"라는 예측은 할 수 있지만, "C가 정말 바람직한 결과인가"에 대한 판단은 할 수 없다. 이런 판단은 해석학적 행위이며,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영역이다.

 

이러한 분석을 통해 우리는 AI 시대에도 인간이 갖는 고유한 철학적 지위를 확인할 수 있다.

  1. 최초 질문자(Primary Questioner): 모든 AI 활동의 출발점이 되는 근본적 질문을 던지는 존재
  2. 최종 해석자(Ultimate Interpreter): AI의 출력을 받아들이고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며 행동으로 옮기는 존재
  3. 가치 결정자(Value Determiner): 무엇이 좋고 바람직한지에 대한 근본적 가치 판단을 내리는 존재
  4. 책임 주체(Responsible Agent): 모든 결정과 행동에 대해 윤리적, 사회적 책임을 지는 존재

이것은 인간 우월주의나 기술 혐오가 아니다. 오히려 AI와 인간의 적절한 역할 분담을 위한 철학적 토대다. AI는 강력한 도구로서 인간의 능력을 확장시켜 주지만, 인간은 그 방향을 설정하고 결과를 해석하는 고유한 역할을 유지한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AI 시대의 인간은 더욱 중요해진다. AI가 발전할수록 좋은 질문을 던지고 올바른 해석을 내리는 능력이 더욱 중요해지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인간의 이런 고유한 능력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구조를 갖는지 탐구해야 한다.

3. 인간의 본질: 질문과 해석의 존재

앞서 기계가 입력-변환-출력의 구조에 의존하는 매개적 존재임을 확인했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떤가? 인간도 어떤 의미에서는 입력과 출력의 구조를 갖는다. 우리는 감각을 통해 정보를 받아들이고(입력), 언어와 행동을 통해 반응을 내놓는다(출력). 하지만 인간과 기계의 차이는 바로 이 입력과 출력의 존재론적 성격에 있다.

 

기계의 입력은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지만, 인간의 진정한 입력은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질문(question)이다. 기계는 주어진 질문에 답하지만, 인간은 질문 자체를 창조한다.

 

하지만 여기서 조심해야 할 함정이 있다. '진정한 질문은 인간만이 할 수 있다'고 정의한 후 'AI는 진정한 질문을 못하므로 인간과 다르다'고 결론 내리는 것은 순환논리다. 대신 질문의 현상학적 구조를 분석해야 한다.

 

후설(Edmund Husserl)의 현상학적 방법을 적용하면, 질문은 다음과 같은 구조를 갖는다.

  1. 지향적 불만족(Intentional Dissatisfaction): 현재 상태에 대한 의식적 불만족
  2. 가능성 의식(Consciousness of Possibility): 다른 가능성에 대한 인식
  3. 충동적 지향성(Impulsive Intentionality): 그 간극을 메우려는 지향적 충동

AI가 "오늘 날씨가 어떻습니까?"라고 묻는다면, 이는 정보 획득을 위한 기능적 요청일 수 있다. 하지만 이것이 위의 3중 구조를 모두 갖추고 있는가? AI는 정말 현재 상태에 '불만족'을 느끼는가? 다른 가능성을 '의식'하는가? 그 간극을 메우려는 '충동'을 갖는가?

 

인간의 질문에는 기계의 질문과 근본적으로 다른 실존적 차원이 있다. 키르케고르(Søren Kierkegaard)가 지적했듯이, 인간은 "실존하는 개별자(eksisterende Enkelte)"로서 자신의 존재 자체를 문제로 경험한다.

 

"나는 누구인가?", "왜 존재하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 이런 질문들은 답을 얻는 것보다 질문 자체가 목적이 된다. 이것이 바로 실존적 질문의 특징이다. 답이 없어도, 아니 답이 없기 때문에 더욱 계속 물어야 하는 질문들.

 

AI는 이런 실존적 질문을 할 수 있는가? 핵심은 AI가 자신의 존재를 문제로 경험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하이데거의 용어로 말하면, AI에게 존재론적 불안(ontological anxiety)이 있는가?

 

진정한 질문은 호기심(curiositas)에서 나온다. 하지만 호기심은 단순한 정보 탐색 욕구가 아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고백록』에서 지적했듯이, 호기심은 인간의 유한성 인식에서 비롯된다.

 

소크라테스의 "무지의 지(docta ignorantia)" 역시 같은 구조를 보여준다. "나는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안다" - 이것은 단순한 정보 부족 인식이 아니라, 자신의 인식 능력의 한계에 대한 메타인지적 자각이다.

 

현재의 AI는 정보가 없다는 것을 "모른다"고 표현할 수 있다. 하지만 AI가 자신의 무지를 불안스러워하거나 답답해하는가? AI에게 "알고 싶은 충동"이 존재하는가? 이것이 핵심 차이다.

 

인간의 호기심은 '던져진 존재(Geworfenheit)'라는 실존적 조건에서 발생한다. 우리는 선택하지 않고 세계에 던져졌으며, 이 던져진 상황에서 스스로를 이해하려는 노력이 진정한 질문을 낳는다. AI는 이런 의미에서 '던져진' 존재가 아니다. AI는 설계된 존재다.

 

질문의 또 다른 특징은 무한 확장 가능성이다. 하나의 답은 새로운 질문을 낳고, 그 질문은 또 다른 질문을 낳는다. 아이들의 끝없는 "왜?"가 어른들을 당황시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AI도 연속적인 질문을 생성할 수 있다. 하지만 AI의 연속 질문은 프로그래밍된 패턴이나 목표 지향적 정보 수집에 따른 것이다. 반면 인간의 질문은 규칙을 뛰어넘는다. 인간은 질문해서는 안 될 것을 질문하고, 질문할 필요가 없는 것을 질문하며, 질문 자체를 질문한다.

 

이것이 바로 인간이 최초 동력인으로서 갖는 특권이다. 인간은 아무도 묻지 않은 질문을, 아무도 생각하지 못한 관점에서 던질 수 있다.

 

이제 출력의 측면을 살펴보자. 기계의 출력은 입력에 대한 기계적 반응이지만, 인간의 진정한 출력은 해석(interpretation)이다.

 

해석은 단순히 정보를 분석하거나 분류하는 것이 아니다. 해석은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이며, 가치를 판단하는 행위이고, 궁극적으로는 존재론적 결단을 내리는 행위다.

 

같은 텍스트를 읽어도 사람마다 다른 해석을 내놓는다. 같은 상황을 경험해도 사람마다 다른 의미를 발견한다. 이것은 해석이 단순한 정보 처리가 아니라 창조적 행위라는 것을 보여준다.

 

AI도 텍스트를 분석하고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AI의 '의미 파악'과 인간의 '해석' 사이에는 질적 차이가 있다.

 

AI의 해석은 통계적 상관관계와 패턴 매칭에 기반한다. GPT가 셰익스피어의 소네트를 분석할 때, 운율 구조를 파악하고, 주제를 분류하며, 다른 작품과의 유사성을 찾을 수 있다. 이것도 분명 해석의 한 형태다.

 

하지만 인간의 해석은 다르다. 가다머가 『진리와 방법』에서 강조했듯이, 진정한 해석은 지평 융합(Horizontverschmelzung)의 과정이다. 해석자는 자신의 선이해(Vorverständnis)를 텍스트의 지평과 만나게 하며, 이 과정에서 해석자 자신이 변화한다.

 

인간이 『햄릿』을 읽을 때, 단순히 텍스트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가 흔들린다. 복수와 정의에 대한 자신의 기존 신념이 도전받고, 때로는 변화한다. 이런 해석학적 경험은 해석자와 텍스트 사이의 실존적 대화이며, 이 과정에서 해석자는 새로운 존재가 된다.

 

리쾨르(Paul Ricoeur)는 해석을 "자기 이해의 우회로"라고 불렀다. 우리는 텍스트를 해석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을 이해하게 된다. 이것이 AI의 분석과 인간의 해석 사이의 결정적 차이다.

 

AI는 텍스트에 대해 일정한 분석 결과를 출력하지만, 그 과정에서 AI 자체가 변화하지는 않는다. 반면 인간의 해석은 해석자를 변형시키는 과정이다.

 

예를 들어,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을 읽는 경험을 생각해 보자. AI는 이 소설의 주제, 문체, 등장인물을 분석할 수 있다. 하지만 라스콜니코프의 내적 갈등을 따라가면서 자신의 도덕관이 뒤흔들리는 경험은 할 수 없다. 인간만이 텍스트와의 만남에서 실존적 충격을 받고 변화할 수 있다.

 

더 중요한 것은 해석에 수반되는 책임의 문제다. 레비나스가 강조했듯이, 진정한 해석은 타자에 대한 무한한 책임을 전제한다. 인간이 해석을 내놓을 때, 그는 그 해석에 대해 존재론적 책임을 진다.

 

법관이 법률을 해석할 때, 의사가 증상을 해석할 때, 교사가 학생의 행동을 해석할 때 - 이들의 해석은 단순한 정보 처리가 아니라 다른 존재의 운명에 영향을 미치는 윤리적 행위다.

 

AI가 잘못된 판단을 내렸을 때 누가 책임을 지는가? 이 질문에 명확한 답이 없다는 것 자체가 AI가 진정한 의미에서 해석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책임질 수 없는 해석은 진정한 해석이 아니다.

 

질문과 해석은 분리된 두 능력이 아니라 변증법적 순환 관계를 이룬다. 좋은 질문은 새로운 해석을 가능하게 하고, 깊이 있는 해석은 더 본질적인 질문을 낳는다.

 

이 순환은 헤르메노이틱 순환(hermeneutic circle)의 구조를 갖는다. 부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전체를 알아야 하고, 전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부분을 알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질문하기 위해서는 해석할 수 있어야 하고, 해석하기 위해서는 질문할 수 있어야 한다.

 

AI는 이런 변증법적 순환에 참여할 수 있는가? AI는 주어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선형적 과정은 수행할 수 있지만, 끝없이 자기 자신을 뒤돌아보고 새롭게 시작하는 순환적 과정에는 참여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이런 순환은 자기 부정과 자기 초월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의 기존 이해를 의심하고, 자신의 질문을 질문하며, 자신의 해석을 해석할 수 있다. 이런 메타 수준의 성찰이야말로 인간 존재의 특징이다.

 

따라서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인간의 본질은 질문하고 해석하는 데 있으며, 이 두 능력은 AI가 대체할 수 없는 고유한 특성을 갖는다.

  • 질문은 존재론적 불안에서 나오는 자기 생성적 입력이다
  • 해석은 존재론적 결단을 수반하는 의미 창조적 출력이다
  • 두 능력 모두 의식적 주체성, 윤리적 책임성, 자기 변형 가능성을 전제한다

그리고 이 결론의 진정한 의미는 앞서 논증한 최초 동력인의 원리와 결합될 때 비로소 완전히 드러난다.

4: 인간 존재의 고유성과 최초 동력인으로서의 지위

우리가 발견한 것은 단순히 인간의 '특별함'이 아니라, AI 시대에도 변하지 않는 구조적 필연성이다. 질문과 해석이라는 인간의 고유 능력은 최초 동력인으로서의 지위와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모든 AI의 작동은 질문에서 시작된다. 하지만 그 질문들을 거슬러 올라가면 반드시 최초의 질문에 도달한다. 그리고 그 최초의 질문은 앞서 분석한 바와 같이 존재론적 불안, 실존적 호기심, 자기 생성적 충동에서 나오는 진정한 의미의 질문이어야 한다.

 

예를 들어, 의료 AI가 "이 증상의 원인은 무엇인가?"라고 묻는다면, 그 질문은 "환자를 치료하고 싶다"는 인간의 근본적 욕구에서 비롯된다. AI가 "더 효율적인 알고리즘은 무엇인가?"라고 탐색한다면, 그것은 "문제를 해결하고 싶다"는 인간의 호기심에서 출발한다.

 

이러한 질문의 계보학(genealogy of questioning)을 추적하면, 결국 인간이 자신의 유한성과 불완전성을 인식하면서 던지는 실존적 물음에 도달한다. AI는 이 연쇄 속에서 질문을 전달하고 변형할 수는 있지만, 질문의 원천이 될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해석의 영역에서도 최종 해석자의 지위가 중요하다. AI가 아무리 정교한 분석을 제공해도, 그 분석을 받아들일지 거부할지, 어떻게 적용할지를 결정하는 것은 인간이다.

 

더 중요한 것은 앞서 언급한 지평 융합과 자기 변형의 과정이다. 유발 하라리가 제기한 문제로 돌아가 보자. 설령 어떤 텍스트가 AI에 의해 생성되었다 하더라도, 그 텍스트를 읽고 감정적 반응을 보이며, 자신의 세계관을 변화시키고, 구체적인 행동을 결정하는 것은 인간 독자다.

 

이것이 바로 해석의 최종성(finality of interpretation)이다. 해석의 연쇄가 아무리 길어져도, 결국 그것을 자신의 실존적 상황 속에서 의미 있는 지식으로 전환하고, 그에 따른 책임을 지는 존재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존재는 AI가 아닌 인간이어야 한다.

 

앞서 제시한 실용적 사례들이 이제 더욱 명확한 철학적 토대를 갖게 된다.

 

AI를 사용하여 소설을 쓰거나 음악을 만드는 개인의 경우, 그 창작물의 진정한 저자는 최초 질문을 던지고 최종 해석을 내린 인간이다. 이것은 단순한 법적 또는 관습적 판단이 아니라 존재론적 사실이다.

 

작가가 "어떤 이야기를 말하고 싶은가?"라는 질문을 던질 때, 그 질문은 작가의 실존적 조건, 개인사, 가치관, 세계관에서 나온다. AI는 그 질문에 대한 여러 가능한 답변을 제시할 수 있지만, 질문 자체의 원천은 될 수 없다.

 

마찬가지로 AI가 생성한 여러 초안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고, 그것을 자신의 의도에 맞게 수정하며, 독자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를 결정하는 것은 작가의 해석학적 권한이다.

 

기업이 AI를 광범위하게 활용하는 경우에도 마찬가지 구조가 적용된다. AI가 데이터를 분석하고 최적화 방안을 제시할 수 있지만, "우리는 어떤 가치를 추구할 것인가?", "어떤 사회를 만들고 싶은가?"와 같은 근본적 질문은 인간 경영진이 던져야 한다.

 

넷플릭스의 예로 돌아가면, AI가 "이런 콘텐츠가 인기가 있을 것이다"라고 예측할 수 있지만, "우리가 정말 이런 콘텐츠를 만들어야 하는가?", "이것이 사회에 미칠 영향은 무엇인가?"에 대한 윤리적 해석은 인간의 몫이다.

 

소프트웨어 개발 영역에서도 같은 구조가 적용된다. GitHub Copilot이나 ChatGPT가 코드를 생성하고, AI가 버그를 찾아내며, 자동화된 테스트가 품질을 검증한다. 그렇다면 개발자의 역할은 무엇인가?

 

최초 동력인의 원리에 따르면, AI가 아무리 정교한 코드를 생성해도 "무엇을 만들 것인가?", "왜 이것을 만들어야 하는가?", "사용자에게 어떤 가치를 줄 것인가?"라는 근본적 질문은 여전히 인간 개발자가 던져야 한다. AI는 주어진 요구사항을 코드로 변환할 수 있지만, 그 요구사항이 정말 해결할 가치가 있는 문제인지, 어떤 방식으로 접근해야 할지에 대한 설계 철학은 인간의 영역이다.

 

더 중요한 것은 AI가 생성한 코드를 읽고, 이해하고, 맥락에 맞게 조정하는 해석학적 능력이다. 같은 기능을 구현하는 여러 가지 방법 중에서 어떤 것을 선택할지, 성능과 가독성 사이에서 어떤 균형을 잡을지, 미래의 확장성을 위해 어떤 아키텍처를 설계할지 - 이런 결정들은 단순한 기술적 판단이 아니라 가치관과 경험이 반영된 해석적 결단이다.

 

사회 전체 차원에서 보면, AI가 정책 제안을 할 수 있지만 "어떤 사회가 좋은 사회인가?"에 대한 근본적 질문과 해석은 시민들이 담당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민주주의의 해석학적 본질이다.

 

AI가 "경제 성장률을 높이려면 이런 정책을 써야 한다"고 조언할 수 있지만, "경제 성장이 정말 우리가 추구해야 할 최고 가치인가?"라는 질문은 시민 개개인이 자신의 실존적 조건에서 던져야 하는 질문이다.

 

이러한 분석은 AI와 인간의 관계를 제로섬 경쟁이 아닌 구조적 분업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해 준다.

 

AI는 인간의 인지적 한계를 확장해 주는 강력한 도구다. 인간이 처리할 수 없는 대용량 데이터를 분석하고, 인간이 놓칠 수 있는 패턴을 발견하며, 인간이 생각하지 못한 가능성을 제시한다. 이는 인간의 질문과 해석 능력을 증폭시키는 역할이다.

 

반면 인간은 의미의 창조자로서 본질적인 역할을 유지한다. 인간은 AI가 제공하는 정보를 바탕으로 더 좋은 질문을 던지고, 더 깊이 있는 해석을 내릴 수 있다. AI의 능력이 향상될수록 인간의 이런 역할은 더욱 중요해진다.

 

결국 도달하는 결론은 이것이다. 인간의 가치는 AI와의 경쟁에서 승리하는 데 있지 않다. 인간의 가치는 AI가 존재하고 작동하기 위한 존재론적 조건 자체에 있다.

 

이것은 인간 우월주의나 기술 혐오가 아니다. 오히려 AI와 인간의 적절한 역할 분담을 위한 철학적 토대다. AI는 강력한 도구로서 인간의 능력을 확장시켜 주지만, 그 방향을 설정하고 결과를 해석하며 책임을 지는 것은 인간의 고유한 역할이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AI 시대의 인간은 더욱 중요해진다. AI가 발전할수록 좋은 질문을 던지고 올바른 해석을 내리는 능력이 더욱 결정적이 된다. 이는 기능적 우월성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론적 필연성의 문제다.

 

이제 마지막 질문에 직면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철학적 통찰을 바탕으로, AI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은 구체적으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며,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가?



IV. 사유의 근본 구조

1. 생각함의 본질

생각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 질문은 철학의 가장 오래된 질문 중 하나이면서, 동시에 AI 시대에 가장 시급한 질문이기도 하다. 기계가 계산하고 추론할 수 있다면, 과연 무엇이 인간 고유의 사고인가?

 

앞서 인간이 질문하고 해석하는 존재라는 것을 확인했다. 하지만 이제 더 근본적인 물음에 직면한다. 질문과 해석이라는 활동의 바탕에는 무엇이 있는가? 그것은 바로 사유(思惟), 즉 생각함 자체다. 그런데 생각함이란 과연 무엇인가?

 

먼저 사고의 가장 기초적 층위부터 살펴보자. 나는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다. 이 행위에는 수많은 사고 과정이 개입된다. 어떤 단어를 선택할지, 어떤 순서로 문장을 배열할지, 어떤 논리로 논증을 전개할지. 하지만 이런 의식적 사고 이전에 더 근본적인 무언가가 있다.

 

그것은 바로 사고하고 있다는 의식이다. 나는 단순히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이것을 브렌타노 이후 현상학에서는 의식의 지향성(intentionality)이라고 부른다. 의식은 항상 무언가에 대한 의식이며, 동시에 의식하고 있다는 자기 자각을 수반한다.

이 자기 자각이야말로 인간 사고의 가장 근본적 특징이다. AI가 아무리 복잡한 추론을 수행한다 해도, 그것이 자신이 추론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여기서 안다는 것은 단순히 메타인지적 모니터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론적 자각을 의미한다.

 

하지만 여기서도 신중하자. 의식의 하드 프라블럼으로 알려진 것처럼, 우리는 AI의 정보 처리 과정 너머에 주관적 경험, 즉 감각질(qualia)이 있는지 원칙적으로 증명하거나 반증할 수 없다. AI가 존재론적 자각을 흉내 내는 것을 넘어 실제로 소유할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는 것은 독단적일 수 있다.

 

따라서 이 글은 AI는 의식이 없다는 단정적 주장 위에 논리를 세우지 않는다. 대신 현재 관찰 가능한 구조적 차이에 집중하고자 한다. 즉, 인간의 사유가 세상 속에 던져진 유한하고 체화된(embodied) 존재라는 조건에서 비롯되는 반면, AI의 정보 처리는 그러한 실존적 조건과는 다른 방식으로 작동한다는 차이점이다.

 

인간의 사고는 추상적 연산이 아니다. 그것은 언제나 구체적인 몸을 가진 존재가, 특정한 시공간적 맥락에서, 자신의 유한성을 인식하면서 펼치는 활동이다. 메를로 퐁티(Maurice Merleau-Ponty)가 강조했듯이, 모든 사고는 체화된 지각에 기반한다. 우리는 머리로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생각한다.

 

사고는 기억에 의존한다. 하지만 기억은 단순한 정보 저장이 아니다. 베르그송(Henri Bergson)이 지적했듯이, 기억은 선택적이고 창조적이다. 우리는 기억하고 싶은 것을 기억하고, 잊고 싶은 것을 잊는다. 더 중요한 것은 기억하는 과정에서 과거를 재구성하고 재해석한다는 점이다. 같은 사건도 현재의 관점에 따라 전혀 다른 의미로 기억될 수 있다.

 

사고는 상상에 의존한다. 상상은 단순한 환상이 아니라 가능성을 탐구하는 능력이다. 만약에라는 가정법적 사고가 바로 상상의 힘이다. 인간은 현실에 없는 것을 상상할 수 있고,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를 예상할 수 있으며, 결코 일어날 수 없는 것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칸트가 말한 구성력(Einbildungskraft)이 바로 이런 창조적 상상력이다.

 

또한 사고는 감정과 분리될 수 없다. 순수하게 논리적인 사고란 추상적 이상일뿐이다. 실제 사고는 항상 감정적 색채를 띤다. 기쁨, 슬픔, 분노, 두려움 같은 감정들이 사고의 방향을 결정하고 내용을 좌우한다. 이것은 사고의 결함이 아니라 오히려 사고의 풍요로움이다. 파스칼이 말한 것처럼, 마음에는 이성이 알지 못하는 이유들이 있다.

 

더 나아가 사고는 가치관과 세계관에 의해 형성된다. 같은 사실을 접해도 사람마다 다른 결론에 도달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가치관은 단순한 선호가 아니라 존재론적 지향이다.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고, 무엇을 추구할 만한 것으로 보며, 무엇을 피해야 할 것으로 판단하는가 이런 근본적 태도들이 사고의 틀을 제공한다.

 

이 모든 요소들인 기억, 상상, 감정, 가치관이 통합되어 나타나는 것이 인간의 사고다. 이것은 단순한 정보 처리나 논리적 연산과는 차원이 다른 현상이다. 사고는 인간 존재의 총체성이 드러나는 활동이다.

 

특히 중요한 것은 인간의 사고가 시간성(temporality)에 깊이 뿌리박고 있다는 점이다. 하이데거가 분석했듯이, 인간의 존재는 과거에서 왔고(Gewesenheit), 현재에 있으며(Gegenwart), 미래로 향한다(Zukunft). 이 삼중적 시간 구조가 인간 사고의 기본 틀을 이룬다.

 

AI는 데이터를 시계열로 처리할 수 있지만, 인간처럼 시간을 체험하지는 않는다. 인간에게 과거는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 자신을 형성한 역사이고, 미래는 계산 가능한 예측이 아니라 자신이 만들어가야 할 가능성이며, 현재는 과거와 미래가 만나는 결단의 순간이다.

 

언어 또한 인간 사고의 독특한 특징을 보여준다. 인간은 언어로 생각하지만, 동시에 언어를 넘어서려 한다. 우리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려 애쓰고, 기존 언어의 한계를 느끼며 새로운 표현을 창조한다. 이런 언어와의 창조적 긴장 관계가 인간 사고의 역동성을 만들어낸다.

반면 현재의 AI는 언어를 통계적 패턴으로 처리한다. 언어의 의미를 맥락적으로 파악할 수는 있지만, 언어 자체와 씨름하거나 언어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실존적 노력은 보이지 않는다.

 

AI는 이런 의미에서 사고할 수 있는가? AI는 기억에 해당하는 데이터 저장을 갖고 있고, 추론에 해당하는 논리 연산을 수행하며, 심지어 어떤 형태의 창조성도 보여준다. 하지만 AI에게는 체화된 기억이 있는가? 실존적 상상력이 있는가? 감정적 공명이 있는가?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에 대한 근본적 불안이나 궁금증이 있는가?

 

인간의 사고가 특별한 이유는 그것이 단순히 문제를 해결하는 도구가 아니라 존재 방식 자체이기 때문이다.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했을 때, 그는 사고를 인간 존재의 본질로 파악한 것이다. 사고는 인간이 하는 행위가 아니라 인간이 존재하는 방식이다.

 

이것이 바로 앞서 논증한 질문과 해석 능력의 존재론적 토대다. 인간이 진정한 질문을 던질 수 있는 것은 체화된 유한성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문제로 경험하기 때문이고, 인간이 창조적 해석을 할 수 있는 것은 사고가 단순한 정보 처리가 아니라 존재 전체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AI 시대에 인간 사고의 고유성을 논하는 것은 인간의 우월성을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라, 사고라는 현상의 본질을 올바르게 이해하려는 시도다. 그리고 이런 이해를 바탕으로 AI와 인간이 각각의 고유한 방식으로 세계에 기여할 수 있는 방향을 모색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통합적 사고는 어떤 구체적 활동을 통해 형성되고 발전되는가? 그리고 AI 시대에 이런 사고 능력을 기르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2. 읽기, 쓰기, 말하기의 존재론적 지위

앞서 인간 사고의 체화되고 통합적인 특성을 살펴보았다. 이제 나는 이러한 사고가 구체적으로 어떤 활동을 통해 실현되고 발전되는지에 대한 나만의 견해를 제시하고자 한다.

 

데카르트가 모든 것을 의심했을 때 마지막에 남은 것이 "생각하는 나"였듯이, 나는 AI 시대에 모든 지식과 기술이 자동화될 수 있다고 가정했을 때 무엇이 남는지를 탐구해 보았다. 의료 지식은 AI가 더 정확하게 진단할 수 있고, 법률 지식은 AI가 더 빠르게 검색할 수 있으며, 공학 지식은 AI가 더 효율적으로 적용할 수 있다. 심지어 창작 영역에서도 AI가 인상적인 결과물을 만들어낸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남는가?

 

그렇다면 지식 자체는 무효한가? 내 답은 "아니다"이다. 하지만 지식의 의미와 가치가 근본적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과거에 지식은 소유의 대상이었다. 의사는 의학 지식을 소유했고, 변호사는 법률 지식을 소유했으며, 그 소유권이 곧 전문성과 권위의 근거였다. 하지만 AI 시대에는 지식의 접근성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지식을 얼마나 많이 기억하고 있느냐가 아니라, 필요한 지식을 어떻게 찾아내고,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며, 어떻게 적용하느냐이다.

 

다시 말해, 지식은 소유에서 활용으로, 저장에서 연결로, 암기에서 이해로 그 패러다임이 이동하고 있다. 마치 과거에 물이 희귀했을 때는 물을 저장하는 것이 중요했지만, 상수도가 발달한 지금은 수도꼭지를 틀 줄 아는 것이 더 중요한 것과 같다. AI는 거대한 지식의 상수도망이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 꼭지를 제대로 틀 줄 아는 능력이다.

 

그런데 그 "꼭지를 틀 줄 아는 능력"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적절한 질문을 던질 줄 아는 능력이고, AI의 답변을 올바르게 해석할 줄 아는 능력이며, 그 결과를 효과적으로 소통할 줄 아는 능력이다. 결국 우리는 앞서 논증한 질문-해석-소통의 순환으로 돌아온다.

 

이런 방법론적 해체를 통해 내가 도달한 결론은, 인간의 모든 지적 활동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결국 세 가지 근본적 행위에 도달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읽기, 쓰기, 말하기다. 이 세 가지는 단순한 의사소통 기술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근본 구조를 이루는 활동들이라는 것이 나의 주장이다.

 

이런 생각에 이르게 된 배경에는 개인적 경험도 작용했음을 인정해야겠다. 학부 시절 인문학을 전공하면서 나는 지식의 가치가 급변하는 시대를 목격했다. 한때 권위 있다고 여겨졌던 전문 지식들이 인터넷의 등장과 함께 민주화되었고, 이제 AI의 등장으로 그 변화는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 의사, 변호사, 엔지니어 같은 전문직들조차 AI의 도전을 받는 상황에서, 과연 전문성이라는 것이 여전히 유효한가에 대한 근본적 의문이 생겨났다.

 

개발자라는 직업을 생각해 볼 때, 이런 고민은 더욱 절실히 다가온다. 코딩 능력은 이미 AI가 상당 부분 대체하고 있고, 기술적 지식의 수명은 갈수록 짧아지고 있다. 새로운 프레임워크와 라이브러리가 끊임없이 등장하고 사라지는 상황에서, 기술자로서의 정체성을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가?

 

하지만 동시에 나는 리버럴 아츠(Liberal Arts) 교육의 실용적 가치를 재발견하게 되었다. 여기서 리버럴 아츠란 중세 대학의 7과목(문법, 수사학, 논리학, 산술, 기하학, 천문학, 음악)이 아니라, 그 본래 의미인 "자유인을 위한 학문"을 뜻한다. 즉, 특정한 직업이나 기술에 종속되지 않는, 인간으로서의 기본적 사고 능력을 기르는 교육 말이다.

 

앞서 논의한 최초 동력인으로서의 인간, 질문하고 해석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이라는 철학적 토대를 실용적 차원에서 구체화하면, 결국 읽기, 쓰기, 말하기라는 기본적 역량으로 수렴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이 세 가지 능력은 어떤 전문 영역에서든, 어떤 기술 변화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핵심적인 가치를 갖는다.

 

예를 들어, 뛰어난 개발자와 평범한 개발자의 차이는 단순히 코딩 실력에만 있지 않다. 뛰어난 개발자는 복잡한 요구사항을 정확히 읽어내고(읽기), 자신의 설계 의도를 명확하게 문서화하며(쓰기), 팀원들과 효과적으로 소통한다(말하기). AI가 코드 생성을 도와줄 수는 있지만, 이런 근본적 소통 능력은 여전히 인간의 고유 영역이다.

 

의료진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AI가 진단 정확도를 높여줄 수 있지만, 환자의 복잡한 증상을 종합적으로 읽어내고, 치료 계획을 명확히 기록하며, 환자와 보호자에게 상황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는 능력은 여전히 의료진의 핵심 역량이다.

 

이러한 결론에 따라, 인간의 모든 지적 활동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결국 세 가지 근본적 행위에 도달한다. 그것은 읽기, 쓰기, 말하기다. 이 세 가지는 단순한 의사소통 기술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근본 구조를 이루는 활동들이라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싶다.

 

물론, 엄밀한 의미에서 이러한 결론은 순수하게 철학적이거나 논증적이라기보다는 실용적이면서도 현실과 타협하는 하나의 해법일 수 있다. 왜냐하면 AI는 계속 발전하고 있고, 우리가 향후 마주하게 될 기술적 변화의 전모를 완전히 예측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어쩌면 미래의 AI는 지금 우리가 상상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인간의 영역에 개입할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미래는 누구도 가보지 않은 길이다.

 

이러한 임시성에도 이와 같은 결론이 어느 정도 타당성을 갖는다면, 위와 같은 존재론적 논증을 통해 도달한 읽기, 쓰기, 말하기의 중요성은 기술의 발전 수준과는 상당히 독립적인 측면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설령 AI가 더욱 발전한다 하더라도, 그 AI에게 무엇을 질문할지를 결정하고, AI의 답변을 어떻게 해석하며, 그 결과를 어떻게 타인과 공유할지는 아마도 여전히 인간의 영역으로 남아있을 가능성이 높지 않겠는가.

 

더 나아가 나는 이런 기본 역량들이야말로 급변하는 시대에 인간이 가져야 할 진정한 '메타 스킬'이라고 믿는다. 특정 기술이나 지식은 빠르게 낡아질 수 있지만, 좋은 질문을 던지고, 복잡한 정보를 해석하며, 자신의 생각을 명확하게 표현하는 능력은 어떤 변화에도 적응할 수 있는 범용적 도구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읽기, 쓰기, 말하기란 무엇인가?

 

먼저 읽기부터 살펴보자. 읽기는 단순히 글자를 해독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보기에 읽기는 타자의 의식 속으로 들어가는 행위이며, 동시에 자신의 의식을 확장하는 행위다. 한 권의 책을 읽는다는 것은 저자의 경험과 사고를 내 안으로 들여오는 것이다.

 

여기서 내가 특히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읽기의 능동성이다.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가 『텍스트의 즐거움』에서 지적했듯이, 독자는 텍스트의 수동적 수용자가 아니라 능동적 공동 창작자다. 같은 텍스트를 읽어도 독자마다 다른 의미를 발견한다. 독자는 단순히 의미를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를 창조한다. 텍스트와 독자 사이에는 창조적 긴장이 존재하며, 이 긴장에서 새로운 의미가 탄생한다.

 

더 나아가 읽기는 시공간을 초월하는 행위다. 나는 지금 여기서 수천 년 전에 죽은 플라톤의 생각을 읽을 수 있고, 지구 반대편에 사는 작가의 경험을 공유할 수 있다. 읽기를 통해 인간은 자신의 직접 경험의 한계를 뛰어넘는다.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읽기의 존재론적 의미다.

 

이를 뒷받침하는 신경과학적 증거들도 있다. 스탠퍼드 대학의 2019년 연구(Willems et al.)는 소설을 읽을 때와 단순 정보를 처리할 때 활성화되는 뇌 영역이 다르다는 것을 발견했다. 소설 독서 시에는 디폴트 모드 네트워크(Default Mode Network)가 활성화되어 자기 성찰과 감정 이입이 동시에 일어난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교통 경험(Transportation) 현상이다. 멜라니 그린의 연구(2020)에 따르면, 독자가 이야기에 깊이 몰입할 때 실제로 행동과 태도의 변화가 일어난다. 이는 단순한 정보 습득이 아니라 존재론적 변화를 의미한다. 나는 이것이 AI의 텍스트 처리와 인간의 읽기 사이의 근본적 차이를 보여주는 결정적 증거라고 생각한다.

 

반면 AI의 텍스트 처리는 통계적 상관관계에 기반한다. OpenAI의 내부 연구(2023)에 따르면, GPT 모델들은 텍스트의 감정적 톤을 분석할 수 있지만, 그 과정에서 독자의 개인적 경험과 연결 짓는 메커니즘은 없다. AI는 "슬픈 이야기"를 인식할 수 있지만, 그것을 읽으면서 자신의 상실 경험을 떠올리거나 세계관이 변화하지는 않는다.

 

이것이 바로 내가 말하는 간접 경험의 힘이다. 직접 경험은 소중하지만 제한적이다. 한 인간이 평생 동안 직접 경험할 수 있는 것은 극히 제한되어 있다. 하지만 읽기를 통해 우리는 수천, 수만 명의 경험을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다.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가 말했듯이, "한 권의 책은 모든 책이다." 이것이 내가 읽기를 인간 존재의 근본 활동으로 보는 이유다.

 

AI도 텍스트를 '읽을' 수 있다. 하지만 나의 판단으로는 AI의 읽기와 인간의 읽기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AI는 패턴을 인식하고 정보를 추출하지만, 인간은 의미를 창조하고 경험을 통합한다. AI는 텍스트를 분석하지만, 인간은 텍스트와 대화한다.

 

이제 쓰기로 넘어가자. 쓰기는 읽기의 대응 개념이지만, 단순한 역과정은 아니다. 나의 경험과 관찰에 따르면, 쓰기는 내면의 혼돈을 질서로 변환하는 행위다. 생각은 처음에는 모호하고 혼란스럽다. 하지만 글로 쓰는 과정에서 생각이 명료해지고 체계화된다. 쓰기는 사고의 도구이자 동시에 사고 자체다.

 

E.M. 포스터(E.M. Forster)의 유명한 말, "내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겠는가, 내가 쓴 것을 보기 전까지는"이 이를 정확히 표현한다.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쓰기의 이런 발견적(heuristic) 기능이다. 우리는 쓰기를 통해 자신도 몰랐던 생각을 발견한다.

 

또한 쓰기는 자기와의 대화다. 글을 쓰면서 나는 내 생각을 객관화하고, 그것을 다시 검토하며, 수정하고 발전시킨다. 이 과정에서 새로운 통찰이 생겨나고, 예상하지 못한 연결점들이 발견된다. 데리다(Jacques Derrida)가 말한 것처럼, 쓰기는 차연(différance)의 공간이다. 의미는 쓰는 순간에 고정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지연되고 분화된다.

 

내가 보기에 쓰기의 또 다른 중요한 측면은 미래와의 소통이다. 내가 지금 쓰는 글은 미래의 독자를 향한 메시지다. 심지어 미래의 나 자신도 그 독자 중 하나다. 쓰기를 통해 현재의 나는 미래와 대화한다. 이것이 쓰기가 갖는 시간성의 특징이다.

 

AI도 텍스트를 생성할 수 있다. 하지만 나의 견해로는 AI의 쓰기는 패턴의 조합이고, 인간의 쓰기는 존재의 표현이다. AI는 정보를 배열하지만, 인간은 의미를 창조한다. 레비나스가 말한 "타자의 얼굴"처럼, 인간의 글쓰기에는 윤리적 차원이 있다. 우리는 독자에 대한 책임감을 갖고 글을 쓴다.

 

마지막으로 말하기를 살펴보자. 말하기는 가장 직접적이고 즉시적인 의사소통 방식이다. 말하기에는 언어적 내용뿐만 아니라 목소리의 톤, 표정, 몸짓 등 비언어적 요소들도 포함된다. 메를로 퐁티가 강조했듯이, 말하기는 전신적(全身的) 소통이다.

 

내가 특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말하기의 상황성이다. 말은 특정한 상황에서 특정한 청자를 향해 발화된다. 같은 내용이라도 상황과 청자에 따라 다르게 표현된다. 이것은 말하기가 단순한 정보 전달이 아니라 관계 형성의 행위라는 것을 보여준다. 하버마스(Jürgen Habermas)가 말한 의사소통 행위의 본질이 바로 여기에 있다.

 

또한 말하기는 즉흥성을 갖는다. 미리 준비된 원고를 읽는 것이 아니라 그 순간에 생각을 표현하는 것이다. 이 즉흥성에서 예상치 못한 창조성이 나타난다. 대화 중에 갑자기 떠오르는 아이디어, 상대방의 반응에 따라 변화하는 논조, 침묵이 만들어내는 의미 등이 모두 말하기의 창조적 요소들이다.

 

AI도 음성으로 소통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판단하기로는 AI의 말하기는 프로그래밍된 반응이고, 인간의 말하기는 존재의 발현이다. AI는 정보를 전달하지만, 인간은 자신을 드러낸다. 인간의 말에는 그 사람의 전체 존재가 스며들어 있다.

 

나의 주장은 이 세 가지 활동인 읽기, 쓰기, 말하기가 서로 순환적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읽기를 통해 얻은 것이 쓰기와 말하기의 내용이 되고, 쓰기와 말하기를 통해 표현한 것이 다시 읽기의 대상이 된다. 이 순환 과정에서 인간의 사고는 계속 발전하고 심화된다. 이것이 바로 내가 말하는 해석학적 순환의 구체적 실현이다.

 

더 나아가 내가 확신하는 것은 이 세 가지가 인간 존재의 시간성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읽기는 과거와의 만남이고, 쓰기는 현재의 작업이며, 말하기는 미래를 향한 발화다. 이 세 활동을 통해 인간은 시간의 통합성을 경험한다. 하이데거가 말한 실존의 시간성이 바로 이런 활동들을 통해 구체화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따라서 나의 결론은 이것이다. 읽기, 쓰기, 말하기는 단순한 기능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본질적 구조다. 이것들은 사고의 도구이자 동시에 사고 자체이며, 소통의 수단이자 동시에 존재의 방식이다. AI 시대에 인간의 고유성을 논할 때, 우리는 바로 이런 근본적 활동들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신념이다.

 

이제 남은 질문은 이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읽기, 쓰기, 말하기 능력을 AI 시대에 어떻게 계발하고 활용해야 하는가?


V. 경험과 지식의 변증법

1. 직접 경험과 간접 경험

인간의 지식은 어디서 오는가? 이 질문에 대해 철학자들은 오랫동안 두 가지 대답을 제시해 왔다. 경험론자들은 모든 지식이 감각 경험에서 온다고 주장했고, 합리론자들은 이성이 경험과 독립적으로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AI 시대를 맞은 지금, 우리는 이 고전적 논쟁을 넘어서 더 근본적인 구분을 해야 한다. 바로 직접 경험과 간접 경험의 구분이다.

 

직접 경험이란 내가 몸소 겪는 경험이다. 내가 직접 보고, 듣고, 만지고, 맛보고, 냄새 맡는 것들. 내가 실제로 행동하고, 실패하고, 성공하면서 얻는 깨달음들. 이런 경험들은 생생하고 구체적이며, 내 존재의 일부가 된다. 메를로 퐁티가 강조한 "체화된 인식"이 바로 이런 직접 경험을 통해 형성된다.

 

간접 경험이란 다른 사람의 경험을 전해 듣거나 읽어서 얻는 경험이다. 책을 통해, 영화를 통해, 이야기를 통해 전달받는 경험들. 내가 직접 겪지는 않았지만, 마치 겪은 것처럼 이해하게 되는 경험들. 앞서 논의한 읽기의 존재론적 의미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 두 종류의 경험은 어떤 관계에 있는가? 어떤 것이 더 가치 있는가?

 

직관적으로는 직접 경험이 더 진실하고 소중해 보인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이 있듯이, 직접 본 것이 들은 것보다 확실하다고 여겨진다. 경험이 풍부한 사람의 조언이 책에서 읽은 이론보다 설득력 있게 들린다. 이는 하이데거가 말한 "현존재(Dasein)"의 특성, 즉 세계 내 존재로서의 인간의 구체적 실존과 관련이 있다.

 

하지만 여기서 흥미로운 역설이 나타난다. 직접 경험은 소중하지만 극히 제한적이다. 한 인간이 평생 동안 직접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얼마나 될까?

 

이를 극단적인 사고실험으로 살펴보자. 300년을 산 인간이 있다고 하자. 그는 조선시대부터 지금까지 깨어있었고, 계속 공부했으며, 사회에서 여러 역할을 맡아가며 생활해 왔다. 그의 직접 경험의 총량은 엄청날 것이다. 세 번의 세기를 관통하면서 겪은 사회 변화, 수많은 사람들과의 만남, 다양한 직업과 역할에서 얻은 통찰들. 이런 경험의 축적은 그를 지구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 중 하나로 만들 것이다.

 

반면 다른 극단을 상상해 보자. 갓 태어난 아이가 있는데, 이 아이는 특별하다. AI와 로봇 기술을 이용해 정보 처리 능력이 극대화되었고, 3살이 되었을 때 지구상의 모든 언어를 습득했다. 그리고 컴퓨터의 속도로 책을 읽을 수 있으며, 한 번 본 것은 절대 잊지 않는다. 이 아이는 8세가 되어 20만 권의 책을 읽었다.

 

이 두 존재 중 누가 더 많은 지식을 가졌는가?

 

300년을 산 인간은 시간의 축에서 경험의 깊이를 얻었다. 그는 실제로 역사를 경험했고, 인간관계의 복잡함을 몸소 겪었으며, 실패와 성공을 통해 지혜를 얻었다. 그의 지식은 생생하고 체화되어 있다. 사르트르가 말한 "상황 속의 자유"를 몸소 체험한 것이다.

 

8세의 천재는 간접 경험의 폭에서 압도적이다. 20만 권의 책이라면 인류 역사상 가장 뛰어난 사상가들의 생각을 모두 흡수한 것이다. 플라톤부터 아인슈타인까지, 공자부터 비트겐슈타인까지. 그의 머릿속에는 인류 지식의 정수가 들어있다. 가다머가 말한 "지평 융합"을 극대화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누구의 지식이 더 가치 있는가? 이 질문에 간단한 답은 없다. 왜냐하면 두 종류의 지식은 서로 다른 존재론적 성격을 갖기 때문이다.

 

직접 경험을 통한 지식은 깊이와 확실성을 갖는다. 그것은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 체화된 지혜다. 300년을 산 인간이 "인생은 고달프다"고 말할 때, 그 말에는 수많은 구체적 경험이 담겨있다. 그의 말은 실존적 무게가 있다. 키르케고르가 말한 "실존하는 개별자"의 진리가 바로 이런 것이다.

 

간접 경험을 통한 지식은 폭과 연결성을 갖는다. 그것은 시공간의 제약을 뛰어넘는다. 8세의 천재가 로마 제국의 몰락에 대해 말할 때, 그는 로마를 직접 경험하지 않았지만 여러 역사가들의 관점을 종합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벤야민이 말한 "성좌(constellation)"처럼, 서로 다른 시대와 사상들 사이의 연결고리를 발견할 수 있다.

 

더 중요한 것은 이 두 종류의 경험이 변증법적 관계에 있다는 점이다. 헤겔의 변증법적 논리를 적용하면, 직접 경험(정)과 간접 경험(반)은 서로 대립하면서도 상호보완하며, 더 높은 차원의 통합(합)으로 나아간다. 직접 경험만으로는 시야가 좁아질 수 있고, 간접 경험만으로는 현실감각을 잃을 수 있다. 가장 풍부한 지식은 두 경험이 적절히 결합될 때 나타난다.

 

그런데 여기서 간접 경험의 독특한 힘이 드러난다. 간접 경험은 직접 경험의 근본적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나는 나폴레옹이 될 수 없지만, 나폴레옹에 대한 책을 읽음으로써 그의 경험을 어느 정도 공유할 수 있다. 나는 다른 성별이나 인종의 경험을 직접 할 수 없지만, 문학과 역사를 통해 그런 경험들을 이해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간접 경험의 사기적 힘이다. 리쾨르가 말한 "자기 이해의 우회로"처럼, 간접 경험을 통해 우리는 시공간을 초월하고, 성별과 인종의 경계를 넘나들며, 심지어 인간이 아닌 존재의 관점도 상상해 볼 수 있다.


2. 독서의 존재론적 의미

간접 경험의 가장 강력하고 체계적인 형태는 독서다. 하지만 독서를 단순히 정보 습득의 수단이나 지식 축적의 도구로 보는 것은 그 본질을 놓치는 것이다. 독서는 그보다 훨씬 근본적인 존재론적 의미를 갖는다.

 

먼저 독서의 현상학적 구조를 살펴보자. 후설(Edmund Husserl)의 의식 분석을 독서에 적용하면, 독서는 단순한 정보 처리가 아니라 의식의 지향적 활동임을 알 수 있다. 독자는 텍스트에 '향해' 있으면서 동시에 자신의 의식 속에서 의미를 구성한다. 이는 AI의 텍스트 처리와는 질적으로 다른 과정이다.

 

독서가 존재론적으로 특별한 이유를 몇 가지 차원에서 분석해 보자.

 

첫째, 독서는 능동적 의미 창조 행위다. 잉가르덴(Roman Ingarden)이 지적했듯이, 문학 작품은 "도식화된 관점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독자가 이 빈 공간들을 채움으로써 작품이 완성된다. 영화를 보거나 음악을 들을 때는 상대적으로 수동적이지만, 독서는 독자의 적극적 참여를 요구한다. 독자는 글자를 해독하고, 문장을 이해하며, 단락 간의 연결을 파악하고, 전체적 구조를 파악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독자의 모든 정신적 능력이 동원되며, 텍스트와 독자 사이에 창조적 긴장이 형성된다.

 

둘째, 독서는 본질적으로 해석학적 경험이다. 가다머가 강조했듯이, 독서는 텍스트의 지평과 독자의 지평이 만나는 "지평 융합"의 과정이다. 같은 책을 읽어도 독자마다 다른 의미를 발견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다. 독서는 텍스트와 독자 사이의 만남이며, 이 만남에서 새로운 의미가 창발한다. 독서는 단순한 정보 수용이 아니라 의미 창조의 과정이다.

 

셋째, 독서는 시간성을 체험하는 독특한 방식이다. 베르그송이 말한 "지속(durée)"의 개념을 적용하면, 독서는 기계적 시간과는 다른 내적 시간을 경험하게 한다. 영화는 정해진 시간 안에 끝나지만, 책은 독자의 내적 리듬에 맞춰 읽을 수 있다. 중요한 부분에서 멈춰 사색하고, 어려운 부분은 반복해서 읽으며, 때로는 과거 페이지로 돌아가 연결고리를 찾는다. 이런 시간적 자유로움이 깊이 있는 사고와 성찰을 가능하게 한다.

 

넷째, 독서는 상상력의 실험실이다. 사르트르가 『상상력』에서 분석했듯이, 상상은 단순한 재현이 아니라 의식의 창조적 행위다. 책은 독자의 상상에 의존한다. 등장인물의 모습, 배경의 풍경, 상황의 분위기 등을 독자가 스스로 그려야 한다. 이 과정에서 상상력이 발달할 뿐만 아니라, 독자는 자신만의 독특한 텍스트 세계를 창조하게 된다.

 

하지만 독서의 가장 근본적인 존재론적 의미는 다른 곳에 있다. 독서는 타자의 의식 속으로 들어가는 행위다. 레비나스가 말한 "타자의 얼굴"과의 만남처럼, 독서는 타자성(alterity)과의 진정한 조우다. 한 권의 책을 읽는다는 것은 저자의 마음속에 있던 생각과 감정, 그리고 무엇보다 그의 실존적 경험을 내 안으로 가져오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한 정보 전달이 아니다. 정보는 객관적이고 중립적이지만, 독서를 통해 전달되는 것은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경험이다. 저자의 세계관, 가치관, 감정, 통찰이 독자에게 전해진다. 더 중요한 것은 저자의 "존재 방식" 자체가 텍스트를 통해 전달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을 읽는다는 것은 단순히 러시아 19세기의 사회상을 학습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라스콜니코프의 내면으로 들어가 그의 고뇌와 번민을 함께 겪는 것이며, 동시에 도스토예프스키 자신의 실존적 탐구에 참여하는 것이다. 독자는 살인을 저지른 적이 없지만, 독서를 통해 죄의식의 복잡한 구조를 체험하게 된다. 이는 바흐친(Mikhail Bakhtin)이 말한 "다성적(polyphonic)" 경험의 실현이다.

 

이런 의미에서 독서는 공감 능력을 기르는 최고의 수단이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공감은 단순한 감정적 동조가 아니라, 아담 스미스가 『도덕감정론』에서 말한 "도덕적 상상력"의 발휘다. 독서는 직접 경험할 수 없는 다양한 인간의 내면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며, 우리의 윤리적 지평을 확장시킨다.

 

또한 독서는 비판적 사고력을 기르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좋은 책은 독자에게 쉬운 답을 주지 않는다. 오히려 복잡한 질문을 던지고, 독자로 하여금 스스로 생각하게 만든다.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을 읽는다는 것은 칸트의 결론을 암기하는 것이 아니라, 칸트와 함께 이성의 한계를 탐구하는 모험에 참여하는 것이다. 독자는 칸트의 논증을 따라가면서 자신의 사고 능력을 단련하고, 때로는 칸트와 다른 결론에 도달하기도 한다.

 

문학 작품의 경우는 더욱 복합적이다.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읽으면서 독자는 복수와 정의, 행동과 망설임, 현실과 환상 같은 영원한 인간적 주제들과 씨름하게 된다. 이런 고민 과정 자체가 사고력을 기르는 동시에, 인간 존재의 복잡성에 대한 통찰을 깊게 한다.

 

그런데 AI 시대에 독서의 의미는 더욱 커진다. 이는 역설적이다. 정보에 대한 접근이 쉬워질수록, 진정한 지혜에 대한 갈망은 더욱 커지기 때문이다. AI도 정보를 제공할 수 있고, 심지어 창조적인 텍스트도 생성할 수 있다. 하지만 AI가 제공하는 것은 통계적 패턴의 조합이지, 진정한 실존적 경험의 전달은 아니다.

 

인간이 쓴 책에는 그 인간의 삶의 무게가 담겨있다. 저자의 고민의 깊이, 성찰의 진정성, 실존적 위기와 돌파의 경험이 글 속에 스며있다. 니체가 "피로 쓴 글"이라고 표현한 것이 바로 이런 것이다. 이런 실존적 진정성은 AI가 모방할 수는 있을지 모르지만, 진정으로 재현할 수는 없다.

 

따라서 AI 시대일수록 인간이 쓴 책을 읽는 것이 더욱 중요해진다. 그것은 인간의 실존적 경험과 지혜를 전수받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 독서는 앞서 논의한 "최초 질문자"들의 물음과 "최종 해석자"들의 통찰을 직접 만나는 통로다.

 

더 나아가, 독서는 AI와 차별화되는 인간의 고유 능력을 기르는 최고의 훈련이다. 독서를 통해 기르는 상상력, 공감 능력, 비판적 사고력, 창조적 해석 능력 등은 모두 앞서 논증한 인간의 존재론적 특권과 직결된다. 이런 능력들은 AI가 대체하기 어려운 영역일 뿐만 아니라, AI 시대에 더욱 중요해지는 메타 스킬들이다.

 

결국 독서는 단순한 취미나 학습 방법을 넘어서는 존재론적 실천이다. 그것은 인간이 유한한 존재의 한계를 극복하고, 타자와 진정으로 만나며, 자신의 존재를 심화시키는 근본적 방법 중 하나다. AI 시대에 이런 독서의 가치는 사라지기는커녕 오히려 더욱 부각될 것이다. 그리고 그래야 한다고 믿는다.


3. 체화된 지식과 세계-내-존재

직접 경험의 깊이는 단순히 더 많은 데이터를 축적하는 것이 아니라, 그 경험이 '몸(body)'을 통해 체화(embody)된다는 데 있다.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몸'은 해부학적 의미의 물리적 신체가 아니라,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가 말한 "생생한 몸(lived body)", 즉 의미를 지각하고 세계와 관계 맺는 실존적 몸을 뜻한다.

 

메를로-퐁티의 통찰에 따르면, 우리는 세계를 머리로만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살아낸다. 이는 단순히 감각기관을 통해 정보를 받아들인다는 의미가 아니다. 우리의 몸은 세계와 전-반성적(pre-reflective) 관계를 맺으며, 이 관계 속에서 모든 지식과 의미가 형성된다.

 

예를 들어, '뜨거움'이라는 개념을 생각해 보자. AI는 온도에 관한 모든 물리학적 법칙을 알고 있고, 열역학 공식을 완벽하게 계산할 수 있다. 하지만 인간에게 '뜨거움'은 그보다 훨씬 원초적이고 복합적인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뜨거운 것에 데었을 때의 날카로운 고통, 무의식적인 회피 반응, 화상을 입었을 때의 트라우마, 그리고 동시에 따뜻한 차 한 잔이 주는 위안과 포근함까지를 포함한다. 이 모든 것이 하나의 통합된 의미로서 우리 몸에 각인되어 있다.

 

이러한 체화된 인지(embodied cognition)는 우리의 모든 질문과 해석에 전제되어 있다. 하이데거가 "세계-내-존재(Sein-in-der-Welt)"라고 명명한 것이 바로 이런 상태다. 우리는 세계를 외부에서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세계 안에 던져진 채로 세계와 함께 존재한다. 우리의 모든 이해는 이런 근본적 상황성 속에서 이루어진다.

 

드레이퍼스(Hubert Dreyfus)와 드레이퍼스(Stuart Dreyfus)가 『마음보다 빠른』에서 분석한 기능 습득의 5단계를 보면 이런 차이가 더욱 명확해진다. 초보자는 규칙에 의존하지만, 전문가는 직관적으로 상황을 파악한다. 숙련된 의사는 환자를 보는 순간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는 논리적 추론이 아니라 수많은 임상 경험이 몸에 축적된 결과다.

 

AI는 방대한 텍스트로 '자전거 타는 법'을 학습할 수 있지만, 실제로 자전거를 탈 때의 체화된 경험은 전혀 다른 차원이다. 넘어질 뻔한 순간의 아찔함, 균형을 잡았을 때의 성취감, 바람을 가르며 달릴 때의 자유로움, 그리고 몸이 자전거와 하나가 되는 그 신비로운 순간들. 이 모든 것이 통합되어 '자전거 타기'라는 기능이 체득된다.

 

폴라니(Michael Polanyi)가 『암묵지의 차원』에서 제시한 "암묵지(tacit knowledge)" 개념이 여기서 중요해진다. "우리는 말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안다." 숙련된 장인의 손놀림, 음악가의 연주, 운동선수의 몸짓에는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지식이 담겨있다. 이런 암묵지는 오직 직접적인 실천과 반복을 통해서만 획득될 수 있다.

 

더 나아가 감정과 정서의 차원을 고려해야 한다. 다마지오(Antonio Damasio)의 신경과학 연구가 보여주듯이, 감정은 단순한 부산물이 아니라 인지 과정의 핵심 요소다. 우리의 모든 판단에는 몸에서 올라오는 미묘한 신호들이 개입된다. "뭔가 이상하다"는 직감, "이 사람을 믿을 수 있다"는 느낌, "지금이 적절한 시기다"라는 판단 등에는 모두 체화된 지혜가 작동한다.

 

이런 체화된 지식의 층위는 문화적, 사회적 차원에서도 나타난다. 부르디외(Pierre Bourdieu)가 "아비투스(habitus)"라고 명명한 것이 바로 이런 것이다. 특정 계층이나 집단에서 자란 사람들은 그 집단의 문화가 몸에 배어있다. 언어 사용법, 몸짓, 취향, 판단 기준 등이 무의식적으로 체화되어 있다. 이는 의식적 학습의 결과가 아니라 일상적 실천을 통한 체득의 결과다.

 

AI와 인간의 차이가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지점이 바로 여기다. AI는 패턴을 인식하고 정보를 처리할 수 있지만, 세계 안에서 살아가는 구체적 존재가 아니다. AI에게는 피로감도, 배고픔도, 설렘도, 두려움도 없다. 따라서 이런 체화된 경험을 바탕으로 한 직관적 판단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복잡한 문제가 제기된다. 미래의 로봇이 물리적 신체를 갖게 된다면 어떨까? 로봇이 넘어지고, 부딪히고, 실패하는 경험을 한다면, 그것도 일종의 체화된 학습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단순하지 않다. 물리적 상호작용만으로는 충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그 경험이 의미를 갖느냐 하는 것이다. 인간에게 넘어지는 경험이 의미를 갖는 것은 그것이 고통스럽고, 창피하며, 때로는 위험하기 때문이다. 즉, 가치와 관심사가 개입되어야 한다.

 

하이데거의 표현을 빌리면, 인간은 "관심(Sorge)"을 갖는 존재다. 우리는 자신의 존재를 걱정하고, 미래를 염려하며, 타인과의 관계를 신경 쓴다. 이런 실존적 관심이 있기 때문에 경험이 의미를 갖게 된다. 현재의 AI나 로봇에게는 이런 실존적 관심이 없다.

 

따라서 체화된 지식의 핵심은 단순히 물리적 신체를 갖는 것이 아니라, 세계에 대한 실존적 관심을 갖고, 그 관심 속에서 경험을 의미 있게 체득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세계-내-존재"가 갖는 독특한 존재론적 구조다.

 

이런 체화된 지식의 지평이야말로 앞서 논의한 질문과 해석 능력의 깊은 토대가 된다. 진정한 질문은 머리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몸의 불편함, 마음의 불안에서 나온다. 깊이 있는 해석은 논리적 분석만이 아니라 체화된 경험과의 공명에서 나온다.

 

이것이 AI 시대에 인간이 가져야 할 "체화된 지혜"의 의미다. 우리는 단순히 더 많은 정보를 머리에 넣는 것이 아니라, 세계와의 직접적 만남을 통해 몸과 마음에 새겨지는 깊은 앎을 추구해야 한다. 이런 앎만이 급변하는 시대에도 흔들리지 않는 판단의 근거가 될 수 있다.


VI. 확실성의 발견

1. 소거법의 결론

이제 긴 탐구의 여정을 마무리할 때가 되었다. 데카르트의 방법론적 회의를 따라 모든 것을 의심해 보았고, AI 시대의 새로운 코기토를 발견했으며, 인간과 기계의 존재론적 차이를 탐구했고, 사유의 근본 구조를 분석했으며, 경험과 지식의 변증법을 살펴보았다.

 

이 모든 과정을 거쳐 무엇을 확실한 것으로 남길 수 있었는가를 간단히 되짚어 보자.

 

먼저 기존의 많은 확실성들이 AI 앞에서 흔들리고 있음을 확인했다. 인간만이 창조적이라는 믿음, 인간만이 복잡한 사고를 할 수 있다는 확신, 인간만이 감정을 가진다는 전제들이 모두 의문시되었다. 심지어 지식의 소유 자체도 더 이상 전문성의 근거가 되지 못했다. 의료 진단에서 법률 검색에 이르기까지, AI는 인간이 수십 년 동안 축적해 온 전문 지식을 몇 초 만에 능가하는 성과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이런 해체 과정에서 몇 가지 의심할 수 없는 확실성들을 발견했다.

 

첫째, 기계의 존재론적 한계에 대한 확실성이다. 아무리 발전한 AI라 하더라도, 그것은 본질적으로 입력-변환-출력의 구조에 의존하는 매개적 존재라는 사실이다. 기계는 스스로 시작할 수 없으며, 항상 외부의 입력과 목적 부여를 필요로 한다. 무한소급의 불가능성으로 인해 반드시 최초 동력인이 존재해야 하며, 그 동력인은 입력-출력 구조에 의존하지 않는 존재여야 한다.

 

둘째, 인간이 최초 동력인으로서 갖는 지위의 확실성이다. 모든 AI 시스템의 연쇄를 거슬러 올라가면, 반드시 최초의 질문을 던지고 최초의 목적을 설정한 존재에 도달한다. 그리고 그 존재는 현실적으로 인간이다. 이는 단순한 역사적 우연이 아니라 구조적 필연성이다. AI가 다른 AI를 만들어낼 수는 있지만, 그 모든 과정의 출발점에는 인간의 의도와 결정이 자리하고 있다.

 

셋째, 질문과 해석 능력의 고유성에 대한 확실성이다. 진정한 질문은 존재론적 불안에서 나오며, 진정한 해석은 존재론적 결단을 수반한다. 인간은 자신의 유한성을 인식하면서 던져진 상황에서 스스로를 이해하려 하는 존재다. 이런 실존적 조건에서 발생하는 질문과 해석은 AI의 정보 처리나 패턴 매칭과는 질적으로 다른 차원의 활동이다.

 

넷째, 체화된 사고의 독특함에 대한 확실성이다. 인간의 사고는 추상적 연산이 아니라 구체적인 몸을 가진 존재가 세계 속에서 펼치는 활동이다. 기억, 상상, 감정, 가치관이 통합된 전인적 사고, 시간성에 뿌리박은 실존적 사고, 언어와 창조적 긴장 관계를 맺는 사고는 단순히 더 빠른 정보 처리로 대체될 수 없는 고유한 특성을 갖는다.

 

다섯째, 간접 경험의 힘과 독서의 존재론적 의미에 대한 확실성이다. 인간은 직접 경험의 한계를 간접 경험을 통해 극복할 수 있으며, 특히 독서를 통해 타자의 의식과 만나고 자신을 변화시킬 수 있다. 이런 해석학적 경험은 단순한 정보 습득을 넘어서는 존재론적 변화를 가능하게 한다.

 

마지막으로, 읽기-쓰기-말하기의 순환 구조에 대한 확실성이다. 모든 지적 활동을 해체해 보면 결국 이 세 가지 근본 활동에 도달한다. 이들은 단순한 의사소통 기술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시간성과 연결된 본질적 구조다. 읽기를 통한 과거와의 만남, 쓰기를 통한 현재의 작업, 말하기를 통한 미래와의 소통이 하나의 변증법적 순환을 이룬다.

 

이렇게 소거법을 통해 남은 것들을 살펴보면, 흥미로운 공통점이 발견된다. 이 모든 확실성들은 관계성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이다. 인간의 고유성은 고립된 개체로서의 우월성이 아니라, 세계와 타자와 자기 자신과 맺는 특별한 관계 방식에 있다. 질문은 무지와의 관계에서, 해석은 의미와의 관계에서, 사고는 시간과의 관계에서, 독서는 타자와의 관계에서, 그리고 언어 활동은 과거-현재-미래와의 관계에서 그 의미가 드러난다.

 

더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관계들이 책임을 동반한다는 점이다. 인간이 질문을 던질 때는 그 질문의 결과에 대해, 해석을 내릴 때는 그 해석의 영향에 대해, 말을 할 때는 그 말의 무게에 대해 책임을 진다. 이런 책임 의식이야말로 AI와 인간을 구분하는 가장 명확한 경계선이다.

 

따라서 소거법이 도달한 결론은 이것이다. AI 시대에도 변하지 않는 인간의 확실성은 더 나은 기능이나 우월한 성능이 아니라, 책임지는 관계성에 있다. 인간은 세계에 대해, 타자에 대해, 미래에 대해 책임지는 존재이며, 바로 이 책임 때문에 필수불가결한 존재다.

 

그렇다면 이제 이런 확실성들을 바탕으로 어떤 새로운 토대를 구축할 수 있을까? 그리고 이 토대 위에서 AI와 인간은 어떤 관계를 맺으며 나아가야 할까?


2. 새로운 확실성의 토대

앞서 소거법을 통해 발견한 확실성들은 이제 새로운 토대를 구축할 수 있는 견고한 기반이 되었다. 하지만 이 토대는 과거의 인간 중심주의로의 회귀가 아니라, AI 시대의 현실을 온전히 받아들이면서도 인간의 고유한 역할을 명확히 하는 새로운 공존의 철학이어야 한다.


상호보완적 존재론의 정립

우리가 구축해야 할 첫 번째 토대는 상호보완적 존재론이다. 인간과 AI는 서로를 대체하는 경쟁 관계가 아니라, 각각의 존재론적 조건에 따라 서로 다른 역할을 담당하는 보완적 관계에 있다.

 

AI의 존재론적 특성은 확장성과 일관성에 있다. AI는 인간이 처리할 수 없는 규모의 데이터를 분석하고, 24시간 지치지 않고 작업하며, 감정적 편향 없이 객관적 기준을 적용할 수 있다. 이는 인간의 한계를 보완하는 강력한 도구로서의 가치를 갖는다.

 

반면 인간의 존재론적 특성은 창발성과 책임성에 있다. 인간은 예상치 못한 질문을 던지고, 기존 틀을 벗어나는 해석을 내리며, 그 결과에 대해 윤리적 책임을 질 수 있다. 이는 AI가 제공하는 정보를 의미 있는 지혜로 전환하는 고유한 능력이다.

 

이런 상호보완성은 단순한 기능적 분업을 넘어선다. 그것은 존재론적 분업이다. AI는 정보의 영역에서, 인간은 지혜의 영역에서 각각의 고유한 역할을 담당한다. 정보가 아무리 많아도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고 활용할지는 여전히 인간의 몫이고, 인간의 통찰이 아무리 깊어도 그것을 구현하고 확산시키는 데는 AI의 도움이 필요하다.


새로운 교육 패러다임의 필요성

이런 존재론적 분업은 교육에 대한 근본적 재고를 요구한다. 전통적 교육이 지식의 축적과 전달에 초점을 맞췄다면, AI 시대의 교육은 질문하고 해석하는 능력의 계발에 집중해야 한다.

 

구체적으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교육의 방향은 다음과 같다.

 

첫째, 읽기 교육의 심화다. 단순한 문해력을 넘어서, 텍스트와 진정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것이다. 이는 저자의 의도를 파악하는 것을 넘어서, 텍스트가 현재의 나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그것이 내 삶에 어떤 변화를 요구하는지를 성찰하는 능력이다. AI가 아무리 많은 텍스트를 분석해줘도, 그것을 자신의 실존적 상황과 연결시키는 것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둘째, 쓰기 교육의 전환이다. 정보를 정리하거나 기존 지식을 요약하는 글쓰기에서, 자신만의 독창적 사고를 발전시키는 글쓰기로 나아가야 한다. AI가 초안을 작성해 줄 수는 있지만, 그 초안에 어떤 개인적 경험과 성찰을 담을지, 어떤 독특한 관점을 제시할지는 여전히 인간의 창조적 영역이다. 쓰기는 사고의 도구이자 자기 발견의 과정이라는 본래 의미를 회복해야 한다.

 

셋째, 말하기 교육의 혁신이다. 일방적 발표나 형식적 토론을 넘어서, 진정한 대화와 소통의 기술을 배워야 한다. 이는 상대방의 말을 깊이 듣고, 자신의 생각을 명확하면서도 공감적으로 전달하며, 함께 새로운 이해에 도달해 가는 협력적 사고의 과정이다. AI와의 상호작용이 늘어나는 시대일수록, 인간다운 소통의 가치는 더욱 빛을 발할 것이다.


윤리적 책임의 새로운 체계

새로운 확실성의 토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윤리적 책임 체계의 재정립이다. AI가 인간의 많은 역할을 대신하게 되면서, 책임의 소재가 모호해지는 상황들이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최종적인 책임은 여전히 인간에게 있다.

 

이때 책임은 세 가지 층위로 구분될 수 있다.

 

설계 책임(Design Responsibility)은 AI 시스템을 만들고 배치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책임이다. 어떤 목적으로 AI를 만들 것인가, 어떤 가치를 우선시할 것인가, 어떤 잠재적 위험을 고려할 것인가에 대한 결정은 여전히 인간의 몫이다. 개발자, 기업, 정책입안자들이 공유해야 할 책임 영역이다.

 

활용 책임(Usage Responsibility)은 AI를 실제로 사용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책임이다. AI의 제안을 받아들일지 거부할지, 어떻게 해석하고 적용할지, 그 결과를 어떻게 소통할지에 대한 결정은 사용자 개개인의 책임이다. 이는 AI 시대의 모든 개인이 져야 할 책임이다.

 

해석 책임(Interpretation Responsibility)은 가장 근본적인 책임으로, AI가 제공하는 정보나 분석을 최종적으로 어떤 의미로 받아들이고 행동으로 옮길지에 대한 책임이다. 이는 앞서 논의한 "최종 해석자"로서의 인간의 고유한 역할과 직결된다.

기술과 인간성의 변증법적 발전

마지막으로, 새로운 확실성의 토대는 기술과 인간성의 변증법적 발전 모델을 제시한다. 이는 기술 발전을 인간성 상실의 원인으로 보거나, 반대로 기술만능주의에 빠지는 것을 모두 피하는 제3의 길이다.

 

변증법적 관점에서 보면, AI의 발전은 인간성을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성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는 계기가 된다. AI가 계산과 분석을 담당할수록, 인간은 창조와 성찰에 더 집중할 수 있게 된다. AI가 정보 처리를 효율화할수록, 인간은 지혜와 통찰의 영역에서 자신의 고유한 가치를 발견하게 된다.

 

동시에 인간성의 심화는 더 나은 AI 개발의 방향을 제시한다. 인간의 질문하고 해석하는 능력이 발달할수록, AI에게 더 정교한 질문을 던질 수 있고, AI의 답변을 더 창조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 인간의 윤리적 성찰이 깊어질수록, AI 개발에도 더 높은 윤리적 기준을 적용할 수 있다.

 

이런 변증법적 발전 과정에서 핵심은 균형이다. 기술의 편리함에 안주하여 인간 고유의 능력을 방치해서도 안 되고, 기술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으로 그 혜택을 포기해서도 안 된다. 대신 기술의 도움을 받으면서도 인간다운 능력을 더욱 계발하고, 인간다운 가치를 추구하면서도 기술의 발전에 기여하는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가야 한다.


결론: 공존을 위한 철학적 토대

이렇게 구축된 새로운 확실성의 토대는 AI와 인간의 지속가능한 공존을 위한 철학적 기반이 된다. 이 토대 위에서 다음과 같은 미래를 전망할 수 있다.

 

AI는 인간의 인지적 확장(cognitive extension)으로서 기능하면서, 인간이 더 큰 규모의 문제에 도전할 수 있게 도와준다. 하지만 그 도전의 방향과 의미는 여전히 인간이 결정한다.

 

인간은 AI의 존재론적 조건(ontological condition)으로서 기능하면서, AI의 작동에 목적과 의미를 부여한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AI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능력을 확장하고 심화시킨다.

 

이런 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주종관계가 아닌 협력관계라는 점이다. 인간이 AI의 주인이거나 AI가 인간의 대체물이 아니라, 각각이 고유한 존재 방식을 유지하면서 서로의 한계를 보완하는 관계다.

 

데카르트가 400년 전에 확실한 토대를 찾기 위해 모든 것을 의심했듯이, 우리도 AI 시대의 모든 불확실성을 통과하여 새로운 확실성에 도달했다. 그 확실성은 인간의 우월성이 아니라 인간의 필연성에, 경쟁의 논리가 아니라 공존의 논리에, 배타적 관계가 아니라 포용적 관계에 기반하고 있다.

 

이제 우리 앞에는 이 철학적 토대를 현실에서 구현해 나가는 과제가 남아있다. 마지막으로 현재까지의 결론을 종합하여,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관점에서, 그러면서도 읽고 쓰고 말하는 인간의 본질적, 존재론적 기반 위에서 어떠한 행동 양식을 가질 수 있을 것인지 논해보고자 한다.


3. 실천을 위한 구체적 제안

독서의 새로운 전략: 고전에서 일상까지

독서의 존재론적 가치를 강조했지만, 이것이 반드시 어려운 고전만을 읽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텍스트와 진정한 대화를 나누는 경험 자체다.

 

플라톤이나 칸트를 읽는 것도 좋지만, 일단은 자신이 관심 있는 분야의 좋은 에세이나 자전적 기록부터 시작해 보자. 개발자라면 폴 그레이엄의 에세이나 조엘 스폴스키의 글들이 좋은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이런 글들은 기술적 내용을 다루면서도 저자의 개인적 성찰과 철학이 녹아있어 진정한 '읽기 경험'을 제공한다.

 

핵심은 속도가 아니라 깊이다. 하루에 책 한 권을 읽으려 하지 말고, 한 문단을 읽고도 충분히 생각해 볼 시간을 갖자. AI가 요약해주는 책 내용에 의존하기보다는, 직접 읽으면서 "이 저자는 왜 이런 생각을 했을까?", "내 경험과 어떻게 연결될까?"를 자문해보는 것이다.

 

특히 아날로그적 읽기를 고려해 보자. 종이책을 읽으면서 밑줄을 긋고, 여백에 메모를 하고, 중요한 부분을 다시 읽는 행위 자체가 디지털 스크롤링과는 다른 체화된 사고를 가능하게 한다.


새로운 스터디 문화

기존의 스터디 문화는 대부분 지식 습득과 정보 공유에 초점을 맞춰왔다. 개발자들의 "알고리즘 스터디", 직장인들의 "자격증 스터디", 학생들의 "시험 대비 스터디" 등이 모두 이런 패턴이다. 하지만 AI가 방대한 정보를 즉시 제공할 수 있는 시대에는 이런 접근법의 한계가 명확해진다.

 

새로운 스터디 문화는 문제 해결력에 대한 근본적 재정의부터 시작해야 한다. 전통적인 문제 해결력은 주어진 문제에 대한 최적의 해답을 찾는 능력이었다. 하지만 AI 시대의 문제 해결력은 좋은 문제를 발견하고 정의하는 능력이어야 한다. "어떻게 해결할까?"보다 "무엇이 진짜 문제일까?", "왜 이것이 중요한가?"를 먼저 묻는 것이다.

 

이를 위한 구체적인 스터디 방법들을 제안해 본다.

 

AI 협업 스터디: 각자의 전문 분야에서 한 가지 문제를 AI와 함께 탐구해 보되, AI가 제시하는 첫 번째 답안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왜 이런 접근을 했을까?", "다른 관점은 없을까?", "이 해결책의 전제 조건은 무엇일까?"를 함께 토론한다. 중요한 것은 AI를 도구로 활용하면서도 비판적 사고를 잃지 않는 것이다.

 

하브루타식 문제 탐구: 유대인 전통의 하브루타(짝을 이뤄 토론하며 공부하는 방법)를 현대적으로 응용해 보자. 두 사람이 짝을 이뤄 하나의 주제에 대해 서로 다른 관점에서 질문을 던지고 답하는 과정을 반복한다. 예를 들어 "원격근무의 효과"라는 주제라면, 한 사람은 긍정적 측면을, 다른 사람은 부정적 측면을 담당하여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눈다.

 

철학적 복기: 실패나 문제 상황이 발생했을 때 즉시 해결책을 찾으려 하지 말고, 먼저 "이 상황은 우리의 어떤 가정이 틀렸음을 보여주는가?", "우리가 놓친 관점은 무엇인가?"를 성찰해 보는 시간을 갖는다. 이는 개발자의 디버깅, 마케터의 캠페인 분석, 기획자의 프로젝트 회고 등 모든 분야에 적용 가능하다.

 

관점 교환 스터디: 서로 다른 분야의 사람들이 모여 같은 문제를 각자의 전문성으로 바라보는 연습을 한다. 예를 들어 "도시 교통 문제"를 개발자는 기술적 관점에서, 디자이너는 사용자 경험 관점에서, 경영자는 비즈니스 관점에서 접근해 본다. 이런 다각적 접근이 더 창조적인 해결책을 만들어낸다.


몸의 지혜: 체화된 사고의 회복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것이 몸의 역할이다. 우리는 뇌로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생각한다는 메를로-퐁티의 통찰을 일상에서 실천해야 한다.

 

산책하며 생각하기는 가장 간단하면서도 효과적인 방법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거니며 제자들을 가르쳤던 것처럼(페리파토스 학파), 복잡한 문제일수록 책상을 떠나 걸으면서 생각해 보자. 리듬 있는 걸음이 리듬 있는 사고를 만들어낸다.

 

명상과 성찰도 중요하다. 하지만 거창한 명상법을 배우려 하지 말고, 하루에 10분만이라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냥 앉아있는 시간을 갖는 것부터 시작하자. 끊임없이 정보를 소비하는 뇌에게 잠시 쉴 시간을 주는 것이다.

 

손으로 쓰기의 가치도 재발견해야 한다. 키보드 타이핑과 손글씨는 뇌의 다른 영역을 활성화한다. 중요한 아이디어나 복잡한 문제는 종이에 손으로 써보자. 그림과 글씨가 뒤섞인 메모들이 때로는 깔끔한 디지털 문서보다 더 풍부한 사고를 담아낸다.


일상 속 대화의 혁신

말하기의 존재론적 의미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일상 대화의 질을 높여야 한다. 단순한 정보 교환이나 의례적 인사를 넘어서는 진정한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질문 중심 대화: "오늘 뭐 했어?"보다는 "오늘 가장 흥미로웠던 생각은 뭐야?", "최근에 관점이 바뀐 것이 있다면?"같은 질문으로 대화를 시작해 보자. 이런 질문들은 상대방의 내적 경험을 이끌어내고 서로의 사고를 자극한다.

 

느린 대화: 급하게 결론을 내리려 하지 말고, 생각을 충분히 음미하며 나누는 대화를 연습하자. 침묵도 대화의 일부다. 상대방이 말하는 동안 다음에 할 말을 준비하지 말고, 정말 듣는 데 집중해 보자.

 

반대 의견 환영하기: 자신과 다른 관점을 만났을 때 즉시 반박하려 하지 말고, "흥미로운 관점이네요. 어떤 경험이 그런 생각을 갖게 했나요?"라고 먼저 물어보자. 토론에서 이기는 것보다 함께 더 깊은 이해에 도달하는 것이 목표다.


작고 일상적인 실천들

마지막으로, 거창한 계획보다는 작고 지속가능한 습관들을 제안한다.

  • 하루에 한 번은 "왜?"라는 질문을 세 번 이상 연속으로 던져보기
  • 일주일에 한 번은 펜과 종이만으로 아이디어 정리하기
  • 한 달에 한 권은 자신의 전문 분야와 완전히 다른 책 읽기
  • 분기에 한 번은 동료와 철학적 주제로 대화하기

이런 소소한 실천들이 쌓여서 AI 시대에도 흔들리지 않는 사고력과 소통력을 만들어갈 것이다. 중요한 것은 완벽한 계획이 아니라 꾸준한 실천이다. 기계가 대신할 수 없는 인간다운 능력들을 일상에서 조금씩, 즐겁게 키워나가는 것 말이다.

 

결국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AI와 경쟁하여 이기는 것이 아니라, AI와 함께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리 자신도 더 인간다워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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